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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소영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소영 전문가입니다.

김소영 전문가
서울시교육청
Q.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식민통치하에서 독립후 유일하게 선진국반열에 들어선 대한민국 세계가 극찬하는데 일본과 대만은 못마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개인적인 견해지만 일본의 경우, 20세기 초반에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 했다는 것으로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발전을 시기하는 것 같고, 또한 그때의 군국 제국주의 사상을 지닌 정치인들이 적지 않은 편입니다. 전범들을 치켜세우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계속 하고 있죠. 본인들이 지배했던 나라가 이제는 본인들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넘어서려는 모습을 보이니 이에 대한 시기로 반한 감정이 나타나는 것이죠.대만의 경우 한국 문화에 대해 친근감은 있지만, 단교 과정에서 앙금과 한국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있는 편입니다. 여기서 '단교'란 한국이 1992년 대만과 단교했던 것을 말합니다.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경제 발전을 이뤘으며,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한국을 내려다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 편입니다. 그러면서 대만이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로서의 위상이 흔들리자 더 이러한 분위기가 퍼졌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감사합니다.
Q.  백제 근초고왕의 업적에 대해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근초고왕의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1. 가야 및 마한 정복 근초고왕은 다져진 국력과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남쪽으로 영산강 유역,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낙동강 유역의 작은 소국들을 정벌해갔습니다. [일본서기]에는 366년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 가야, 탁순국, 안라 등 가야연맹의 7개 소국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침미다례를 무찌르고, 비리 등 4읍의 항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때 백제는 마한을 실질적으로 멸망시키고, 전남 해안까지 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야연맹에 대한 영향력도 크게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근초고왕은 아들 근구수태자와 함께 직접 전쟁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왜국 용병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백제는 비단, 쇠뿔로 만든 활, 철 등 왜국이 필요로 하는 물건과 앞선 기술력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백제는 369년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했는데, 74.9㎝의 칠지도에는 61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습니다.“태화 4년(369년) 5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제후왕에게 줄 만하다. 앞선 시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신성한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이하게 이 칼을 얻게 된 성스러운 소식이 생겼으므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여라.” 이 명문은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백제가 왜왕에게 하사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왜국은 백제의 앞선 문물을 얻기 위해 백제에 용병을 제공해주는 나라였습니다. 백제는 왜왕에게 뛰어난 검을 줌으로써, 왜국의 협력을 구한 것입니다. 2. 고구려 정벌에 나섬 근초고왕의 상대는 고구려 고국원왕이었습니다.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 황해도 배천군) 지역으로 진격해왔습니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큰 전략을 꾸미고, 근구수태자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게 했습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군이 방심한 틈을 타서, 기습 공격을 시도하게 하여 고구려군 5천여 명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당시 인구나 국토 면적, 병력 규모 면에서 백제는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백제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근초고왕의 탁월한 지휘능력, 첩자의 활약,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지휘하는 통일된 군 명령 체계를 가진 군대 때문이었습니다. 백제군은 모두 황색 깃발을 사용할 정도로 일사불란했습니다. 반면 고구려 군은 왕이 지휘하는 적색 깃발 부대를 제외하면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백제군은 먼저 고구려의 정예군인 적색 깃발 군을 집중 공격하여 격퇴시켰는데 그러자 나머지 고구려군은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전쟁에 패한 고구려가 371년 다시 공격해오자, 근초고왕은 예성강변에 군사를 숨겨두고 기다리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매복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다시금 고구려 군을 격퇴시켰습니다. 근초고왕은 그해 겨울 마침내 정예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습니다.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고구려 고국원왕을 활로 쏘아 맞혔습니다. 비록 고구려 평양성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백제는 고구려왕을 죽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백제는 고구려에 큰 수모를 안기며, 강성함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3. 대륙에도 영향을 줌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에 고구려 서쪽인 요서지역에 영토를 갖고 있었습니다. 요서, 진평군은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일대와는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입니다. 따라서 백제가 이곳에 영토를 가지려면 강력한 해군력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고구려, 마한, 가야를 제압할 정도로 국력이 크게 강해져 있었습니다. 또한 직접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해양 활동을 강화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근초고왕 시기에 충분히 백제가 이곳에 영토를 가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4. 그 외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 외에도 박사 고흥을 시켜 백제의 역사서를 기록하게 했으며, 371년 수도를 한산으로 옮겨 평지에 위치한 기존의 궁성과 함께 거대한 수도권을 만들었고, 372년 진(晉)나라와 사신 왕래를 하는 등 외교 활동 무대를 넓혔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백제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고구려, 신라, 가야가 모두 두려워했던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던 점은 백제 사람들에게큰 자긍심으로 남았습니다. 근초고왕이 개척한 길을 따라 백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와 대륙 동해안은 물론, 차츰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습니다. 백제가 화려하고도 개방적인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근초고왕이 이룩한 업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백제사에 큰 길을 열어준 백제의 13대 왕 (인물한국사, 김용만, 장선환)
Q.  조선시대 칠거지악과 삼불거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칠거지악'이란 아내를 내쫓는 이유가 되는 일곱 가지 사항으로 조선시대 유교사상에서 나온 제도입니다.칠거지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둘째,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셋째, 부정한 행위, 넷째, 질투, 다섯째, 나병·간질 등의 유전병, 여섯째, 말이 많은 것, 일곱째, 훔치는 것입니다.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함은 불효의 표현이고, 아들이 없음은 가계계승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일이며, 부정한 행위는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고, 질투는 축첩제의 유지에 방해원인이 되며, 악질은 자손의 번영에 해로운 것이며, 말이 많은 것은 가족공동생활의 불화와 이간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칠거지악으로 인해 아내를 내쫓는 행위는 아내는 단순히 남편 개인의 처로 맞이한 것이 아니라 조상의 뒤를 이을 가문 자체가 맞이하였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삼불거'는 아내에게 칠거지악의 이유가 있더라도 그 아내를 버리지 못할 세 가지 경우를 뜻하는데, 첫째,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거나, 둘째, 가난할 때에 장가를 들었거나, 셋째, 아내가 돌아가 살 곳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감사합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Q.  양두구육이라는 고사성어의 어디에서 유래하였나요?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두구육(羊頭狗肉)'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제나라 영공은 궁중의 여인에게 남자 옷을 입혀서 구경하는 취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취미가 궁궐 밖에서도 유행하여, 남장을 즐기는 여인들이 갈수록 늘어났다고 합니다.이에 영공은 재상 안영을 불러 궁 밖에 남장하는 여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영공이 어명을 내려도 남장하는 유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합니다. 이에 영공이 다시 재상 안영을 불러 왜 이 유행이 없어지지 않냐고 물었더니, 안영은 궁중에 있는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허용하고 궁 밖에 있는 여인들에게는 남장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밖에 양머리를 걸어놓고 안에서 개고기를 파는 것과 같은 일이라 답했답니다. 그러고는 궁중에 있는 여인들에게도 남장을 금하면, 궁 밖에 있는 여인들도 저절로 남장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간언했습니다. 재상 안영의 말을 듣고나서 영공은 궁중 여인들의 남장을 금지시켰고, 그 후 남장한 여인들이 없었다고 합니다.감사합니다.
Q.  일본이 한국의 토지를 침탈하고자 세운회사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이 조선의 토지를 침탈하고자 세운 회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입니다.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농업 경영과 이민 사업 등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공동 출자로 설립된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국책회사(國策會社)입니다. 원래는 순수한 일본 자본으로 설립될 예정이었으나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한국에서도 출자하게 되고, 임원에 한국인을 등용하는 등 한일 양국의 회사로 수정되었습니다. 설립 당시 동척의 주요 업무는 ① 농사 경영, ② 토지 매매 및 임차, ③ 토지 경영 및 관리, ④ 건축물의 매매 및 임차, ⑤ 이주민의 모집 및 분배, ⑥ 이주민에 대한 물품의 공급 및 생산 또는 분배, ⑦ 척식(拓殖)에 필요한 자금 공급, ⑧ 부대 업무 등으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즉, 동척은 한국의 토지에 일본인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식민 지배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였던 것입니다.1908년 동척 창립 당시 가장 중요한 사업 목표는 조선으로의 일본인 이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 내의 인구, 식량, 사회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식민 지배 체제를 보다 견고하게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만주에서도 여러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주요 거점 도시와 농촌 지역의 부동산 금융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동척의 업무는 직영 사업, 대출, 관계회사 투자 등 세 가지 영역을 주축으로 합니다. 직영 사업의 경우 조선에서는 지주 경영을 주로 하는 토지 경영이나 사유지의 개간 · 간척 등의 토지 개량 사업, 임업 경영, 면양(緬羊) 사업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동척의 농업 경영은 자본가적 지주 경영으로, 동척은 자본주의적 합리적 농업 경영이라는 이름하에 한국 농민에 대한 수탈을 극대화하였습니다. 동척이 토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최고 37%이고, 대체로 20% 선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토지 경영의 경우 투자 대비 수익성이 매우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조선인 농민들의 희생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가장 많은 농경지가 조선에 있었고, 그 농사는 소작 경영으로 이루어진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동척은 조선인 농민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사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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