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로아 카톨릭이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로도 그 권위를 유지한 비결이 뭘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4세기 군사적 약화와 내부적 혼란을 겪고 있던 서로마 제국으로 게르만계의 여러 부족이 이동했습니다. 훈족의 서진에 자극을 받은 게르만민족은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제국 각지에 정착하면서 여러 부족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이 시기 비록 서로마제국은 멸망했으나 로마교회는 건재했습니다.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틴으로 수도를 옮긴 뒤 서로마가 멸망하기까지인 약 100년 동안 로마교회는나름대로 살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후 여러 미개한 부족들은 왕국의 번영을 위해 로마교회와 손을 잡았는데,그중 재빨리 로마교회로 개종한 프랑크왕국은 처음부터 로마교회를 옹호하여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후 로마교회는 다른 게르만민족들을 포교할 목적으로 성상을 세우고, 교회를 웅장하게 꾸미기 시작하며, 타 민족의 풍습을 더욱 과감히 받아들였습니다. 각 지역의 문화적 특색처럼 등장하는 교회지붕 스테인드글라스, 촛불, 성상숭배 등을 들 수 있습니다.이때 로마교회의 위상은 이때부터 하늘 높은 출 모르고 치솟았고, 급기야 506년에는 동로마 황제까지 정책적으로 로마교회를 지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로마교회의 감독을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칙령을 반포하는 한편 590년 '교황'이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바로 천주교황이 탄생하게 됩니다.
Q.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가야는 왜 국가로서 성립을 안하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가야는 국가로서 성립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중앙집권국가라는 체제적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가체제가 고도로 발전해야합니다. 고대시대부터 거슬러가보면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부족사회에서 부족연맹체로, 부족연맹체에서 군장국가로, 군장국가에서 중앙집권국가로 보통 발전단계가 이루어져 있습니다.그 중 가야는 부족연맹체와 군장국가 정도 사이의 수준에서 올라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가야는 총 2번에 걸쳐 중앙집권화를 이룰 수 있었던 시기적 상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두 좌절되게 되니,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1. 우선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부족연맹체 단계까지 정치적 수준이 올라가나, 이 때 금관가야를 상대로 발생한 반란인 포상팔국의 난으로 인해 사로국(신라)에게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사로국에 의해 금관가야가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며 정치체계의 발전이 더뎌집니다.2. 그러던 중 4세기, 백제의 전성기 시기에 백제가 가야에게 손을 내밀어 신라를 공격하게 합니다. 당시 가야연맹체는 신라에게 계속된 간섭을 받던 중 백제 덕분에 이를 극복할 수 있게 되자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때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이 원병을 보내주어 신라를 구원해주고 가야까지 진격해서 임나가라 종발성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당시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연맹왕국은 붕괴됩니다.3. 그리고 금관가야가 쇠퇴하면서 그 뒤에 등장한 세력이 바로 대가야입니다. 이후 가야연맹체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중앙집권화를 이루고자 하나, 고구려의 전성기 때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와 신라가 결혼동맹을 하게됩하게됩니가야는 상대적으로 백제와 신라보다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이 두 나라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코 이 두 나라가 손을 잡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여파로 백제와 신라가 손을 잡게 되니 당연히 둘 사이에 끼여버린 가야연맹왕국은 백제와 신라에게 조금씩 영향력을 뺏기게 되고, 이후 신라가 가야영역의 대부분을 흡수하게 되면서 신라의 전성기가 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