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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음악_영어_유학_육아_박순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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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기 전문가
동아대학교, 부산대학교
Q.  발해가 중국의 역사가 아닌 근거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발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구당서와 신당서, 요사, 고려 사, 일본 측의 기록 등이 당시에 남아 있는 주된 사료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점은 당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 측 사료이다. 여기에서는 대 조영은 고구려의 별종이라 단언하고 있으며, 대조영이 말 갈족의 수장이라고 서술한 바는 없다. 즉, 중국인 스스로가 발해의 건국세력이 말갈족이 아니라 고구려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발해의 주변국 또한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하 고 있다. 발해 국왕 스스로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 고려 국 왕이라 칭하며, 일본에서도 발해를 고려국이라 칭하고 있 다. 발해가 당과는 다른 독립된 국가라는 것은 발해의 국 왕이었던 무왕의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무왕은 장문 휴로 하여금 당의 산둥반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세상의 어느 국가가 한낱 지방 정권이 중앙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를 묵인한단 말인가? 이는 당 스스로가 발해를 독립적 인 국가로 인지하고 있던가, 아니면 이를 모를 정도로 지 방에 대한 통제력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Q.  제1차세계대전 때 미국이 참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합니다. 이후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상전력이 부족했던 독일제국은 영국으로 접근하는 수송선을 격침시킨다는 작전을 실행합니다. 1915년 5월 7일 큐나드 라인이 운영하는 여객선 RMS루시타니아 호는 아일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제국 해군의 유보트 U20의 어뢰에 맞아 침몰합니다. 앞서 독일은 각국의 일간지를 통해 "독일 제국은 영국과 전쟁 중이니 영국에 접근하는 선박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루시타니아호는 이를 무시하고 영국으로 향했죠. 결국 루시타니아호 탑승자 1959명 중 761명만이 살아남았죠. 불과 3년 전인 1912년 4월 타이타닉 침몰사고가 있었기에 루시타니아호에 구명정 등의 구조물품은 충분히 있었지만, 어뢰로 인한 폭발과 배가 18분만에 침몰해버리면서 많은 이들이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루시타니아호는 어느 나라나 군대가 아닌 민간이 운영하는 배였습니다. 루시타니아호가 독일의 경고를 무시한 것도 민간선박이기 때문에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점 때문이었죠. 그러나 독일은 루시타니아호에는 무기가 실려있었기 때문에 공격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루시타니아호는 영국 해군의 보조함으로 등록돼 있었고, 이후 총탄 등의 군수물자를 싣고 있었다고 밝혀졌죠. 그러나 독일의 무차별적인 잠수함 작전에 미국은 격분합니다.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하면서 미국인 128명이 숨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은 치머만 전보사건과 같이 미국의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의 원인이 됩니다.
Q.  송나라는 신분제가 거의 철폐되었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송나라의 주요 이념이었던 유교 때문에,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았으나 여전히 중국의 타 왕조기에 비하여 높은 자율성을 누렸다. 이들은 사회적, 법적 특권들을 누렸으며 집에서도 어느 정도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또한 조그만 사업들을 직접 할 수 있기도 하였다. 송나라의 사회가 점차 부유해지고, 결혼을 할 때에도 신부 쪽 가문에서 더 많은 지참금을 내게 되자, 가정에서 여성들의 발언권은 점차 증가해갔다. 남자 자손이 없는 경우, 딸들이 대신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고, 아들이 없는 여성의 경우에도 이를 모두 상속받을 수 있었다. 송나라 시대에는 여성들에게도 고등 교육을 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이 때문에 여성들의 교육 수준도 자연히 높아 나중에 자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할 정도였다. 이 시기에는 특출난 여성 시인들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유명한 여성 시인 이청조였다.
Q.  영남,영동,호남,호서라는 명칭은 왜 붙여진건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동 지방 : 백두대간(태백산맥)의 동쪽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강원도 동부 지역인 강릉, 속초, 동해, 태백 등이 위치한 지역입니다.영서 지방 : 백두대간(태백산맥)의 서쪽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강원도 서부의 춘천, 홍천, 횡성 등이 속한 지역을 가리킵니다.영남 지방 :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동남쪽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그리고 부산시, 울산시, 대구시 등이 포함된 위치입니다.호서 지방 : 금강 상류의 서쪽을 가리키며 충청남도와 충청북도 그리고 대전시와 세종특별자치시가 위치한 충청도 일대입니다.호남 지방 : 금강 하류의 남쪽 지역을 가리키며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그리고 광주시까지 전라도 일대를 말합니다.관동 지방은 영동 지방과 같은 태백산맥 동쪽을 말했는데 서쪽(영서 지방)의 마을들이 성장하면서 강원도를 총칭하는 지방명이 되었습니다.또한 관서 지방은 평안도 일대를 가리키며 관북 지방은 함경도 지역을 말하고 해서 지방은 황해남도와 황해북도의 위치를 말합니다.
Q.  궁녀의 품계는 정5품부터 종9품까지 각품계명도 있었는데, 정5품~종9품까지 모두 '상궁'이라 불렸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인[內人]들과 그 아래 하역(下役)을 맡은, 무수리[水賜]·각심이(방아이)·방자(房子)·의녀(醫女)·손님이라 불리는 여인들이 범주에 든다.그러나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거대한 인구의 여인들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의 궁녀로 포괄되는 내역은 다음과 같다.① 무수리 : 몽고말이며,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을 말한다. 민족 항일기에는 궁 밖에서 매일 통근하는 제도였다고 하나, 원래는 궁중에 붙박이로 소속되어 있었다.② 각심이[婢子, 또는 房子] : 비번 날 사는 개인 집인 상궁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식모·침모 등의 총칭이다.이들의 월급을 국가에서 지급했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방자란 관청의 사환으로, 예컨대 <춘향전>에서의 방자와 같다.③ 손님 :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堂號)가 바쳐지고 독립 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 같은 여인이다. 대개 친정붙이이며, 보수는 후궁의 생계비에서 지출된다. 따라서,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무수리나 각심이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말이다.④ 의녀 : 약방 기생이라고도 한다. 약방이란 궁중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이며, 의녀의 소속이 내의원이지만 전신(前身)이 기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소임은 평상시에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주기도 하고 비·빈들의 해산에 조산원(助産員) 노릇도 하지만,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으로 변신한다. 원삼(圓衫)을 입고,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삼(汗衫)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이기도 하다.원래 의녀 제도는 궁중에서 비빈을 비롯해 궁녀들이 내외법으로 말미암아 남자 의원의 진맥을 회피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태종 때 창고궁사(倉庫宮司)의 어린 비자(婢子) 중에서 수십 명을 뽑아 진맥과 침 놓는 법을 가르친 것이 그 시초이다.그러나 원래 배우지 못한 천민이라 무식해서 별로 성과가 없었으므로, 연산군대에 와서는 서울 각 관청에서 잔치가 있을 때 아예 화장을 시켜 기생으로 참가시켰는데, 이러한 제도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내려왔다.고종대만 해도 의녀의 수가 80명이나 되었으나, 서양의사(西洋醫師)가 궁중에 들어오고나서부터 의녀 제도는 없어졌다.⑤ 나인 :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였다. 나인과 상궁은 그들 사회에서는 차원이 다를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또한,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보통 4세부터 계례(筓禮) 전인 17세 사이의 어린이 및 소녀 나인들이다.그리고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나인·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정7품도 있고 정5품도 있으며, 또 같은 정5품의 상궁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같을 수 없었다.실제로 궁녀는 왕족의 사생활을 위한 일종의 사치 노예이므로,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은 의식주로 분장(分掌)된 각 독립처소이다.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내소주방(內燒廚房)·외소주방·생과방(生果房)·세답방(洗踏房)의 일곱 부서 외에 세수간·퇴선간(退膳間)·복이처(僕伊處)·등촉방(燈燭房)의 네 부설 부소가 있다.위 부서에 소속된 궁녀들을 일반 개인 가정으로 비교해보면, 지밀나인은 몸종격으로 가장 격이 높고, 침방·수방 나인들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찬간(饌間)의 식모들인데, 궁중에는 무수리가 하역(下役)을 맡았다.세답방은 표모(漂母)로서 빨래 일을 맡는데, 일반 개인 가정에서는 빨래를 보통 노비가 하고, 다리미와 다듬이질은 대개 경험이 많은 부인들이 맡는다.따라서 궁녀의 격은 지밀이 가장 높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그것은 마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상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올릴 필요가 없기도 한 때문이다.위 세 부서 외의 다른 부서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올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시가 있는 곳도 지밀과 침방·수방뿐이다. 나머지 부서들은 생[絲楊]을 맬 수 없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다.궁녀의 수는 중국 한대에 약 600명 정도였다. 궁녀는 왕이 있는 법궁(法宮, 또는 本宮)뿐만이 아니라 제사궁(祭祀宮, 혹은 魂宮)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그러나 본궁의 궁녀들은 별궁나인을 ‘궁것’이라고 경멸했다. 본궁의 경우, 왕을 비롯해 모두 독립 세대로 영위되며 왕과 왕비와 왕대비 등은 같은 규모의 궁녀 인구를 갖는다.궁녀가 90명이라 할 때 왕·왕비·대비전의 처소별 궁녀수는 대개 지밀 20∼27명, 그밖에는 15∼20명 정도로 추측된다.이러한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는데,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 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다.즉,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下庫)의 물품을 관리했다.그리고 일명 지밀상궁으로도 불리는 대령상궁(待令尙宮)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했다.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또한,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마지막으로,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으며,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와서 상궁들이 두세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수방은 중인 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 계급이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세, 침방·수방이 6∼13세,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복장이었다.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이들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종2품 숙의(淑儀) 이상으로 봉해져서 독립 세대를 영위하게 되었던 것이다.궁녀의 보수는 고정적으로 아기나인이 한달에 백미 너말(4斗 : 오늘날의 3두꼴)이고, 옷감이 1년에 명주와 무명 각 1필, 여름에는 베·모시도 하사품으로 내려 충분히 쓰고 남을 정도였다. 식생활은 궁중에서 해결되었으므로, 이러한 보수는 친가 부모·형제들에게 보탬이 되었다.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서는 월급제가 실시되었는데, 상궁들은 고등관 대우를 받았고, 제조 상궁쯤이면 장관급의 대우를 받았다.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지만, 특별한 경우, 즉 이들이 중병이 들었을 때,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단,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특히, 가뭄으로 인한 궁녀 방출은 가난으로 국가에서 결혼 못한 노총각에게 결혼 비용을 지급하는 의미와 같은 이치이다. 젊은 궁녀가 헛되이 왕권의 그늘에서 늙어 가는 부당성을 국가에서 인정한 증거이다. 결국 이러한 궁녀 제도는 절대군주국가 시기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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