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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음악_영어_유학_육아_박순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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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기 전문가
동아대학교, 부산대학교
Q.  우리나라 최초의 놀이동산은 언제 들어온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놀이공원은 1976년 4월에 만들어진 용인자연농원이다. 현재의 이름은 에버랜드로 놀이기구와 동물원과 식물원, 수영시설까지 갖추었다.
Q.  조선시대에 고려삼은 이라고 기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저 셋이 삼은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와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조선 중후기의 사림을 형성하는 성리학자들이 다름 아닌 야은 길재의 후학들이기 때문에, 이색-정몽주-길재로 이어지는[2] 동방 성리학의 거성들을 숭상하기 위해 여말삼은이라 칭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즉 이에 따르면, 이숭인이 삼은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정도전의 모략에 의해 장살당해 제자를 못 남겼기 때문. 사망 당시 이숭인은 46세였다. 젊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인데도 그 이전에도 확실한 제자를 두지 못한 이유인 즉, 이 아저씨는 고려 정국이 변할 때마다 족족 귀양길에 오르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사대부가 탄압받을 때는 사대부라 귀양가고 이인임이 몰락하자 이인임 친척이라 귀양가고 조선건국 즈음엔 고려유지파라 귀양가고.참고로 당시 고려에는 은(隱)자를 호에 쓰는 경향이 매우 많았다.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은자 돌림 호가 꽤 많이 나온다. 대표적 인물이 대은(大隱) 변안열. 심지어 권문세가의 수장 이인임도 초은(樵隱) 이인복이라는 멀쩡한 형을 두었다. 신진사대부에서 권문세가 쪽으로 변절한 동정 염흥방도 어은(漁隱)이라는 호도 썼었다. 이런 현상은 당대 헬게이트나 다름 없었던 고려의 상황을 사대부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말하자면 '은일(隱逸)' 의식이 당대 사대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이색은 이런 은일의식이 지배하는 당대의 지식인 풍조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지 제자 이숭인이 '도은'이라는 호를 짓자 "나야 늙었으니 괜찮지만, 자안(이숭인의 자)은 앞길이 창창한 시기인데 은(隱)으로 이름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비판했으며, 정몽주에 대해서는 "달가(정몽주의 자)는 채소밭에 숨어 있으나 조정에 서서 유학의 부흥을 자임했고, 엄한 얼굴로 학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니 그는 진정으로 숨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Q.  사람의 관상이나 손금,사주 등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리심리상담사란?명리심리상담사란 명리를 통한 성격 및 적성 심리검사의 오류를 보완하고 내담자의 본성을 통해 진로를 과학적으로 평가함으로서 내담자의 경제적 비용과 시간, 노력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담자 자신의 적성을 알고 진로를 스스로 선정할 수 있도록 상담자가 안내와 도움을 주는 심리 전문가를 말합니다.※ 진로 및 전망명리심리상담사는 자격증 취득 후 학교기관에서 운영하는 진로 및 성격검사 프로그램에 참여가 가능하고 적성검사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심리치료센타에서 심리검사 분야에 명리심리상담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많은 심리검사 도구가 많이 있는 실태입니다. 하지만 심리검사의 오류를 조금이라도 과학적으로 평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검사방법이라고 판단하며 다른 검사도구와 병행 해서 사용한다면 승수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명리심리상담사는 산업체 및 심리상담소에서 많이 필요로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활용유형- 심리분석사, 심리상담사, 임상심리상담사, 진로코칭 종사자- 주요활용처 : 아동지도교사, 사회복지관, 학교기관 상담사, 개인심리상담소 및 쉼터, 사회복지시설, 아동상담센타, 청소년상담소, 지자체, 교회 등 종교시설, 기타 학생 문제 예방상담소운영 등
Q.  청산리 대첩은 어떤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항일무장독립운동사상 공전의 대승을 기록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이 거둔 구체적 전과를 파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호 적대관계에 있던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투 현지였던 중국측의 자료마다 각기 그 내용이 달리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전과를 명확히 파악하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측이 절대적으로 압승한 사실
Q.  한국인을 몽골인들의 후예라 할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전적으로는 몽골의 후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몽골풍, 고려양 과 같은 말들입니다. 몽골의 문화가 고려로 퍼져나간 주요한 경로는 당시 몽골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친원파들, 몽골 황실에서 성장했던 왕자들[1], 그리고 고려 왕에게 시집온 몽골 공주들[2]을 통해 들어오거나 고려에서 실용적인 이유로 직접 수입하여 받아들인 경우들이었다.대표적인 사례를 찾자면 먼저 식생활에서는 알코올을 증류해서 빚는 소주, 소의 뼈를 물에 삶아 파를 넣고 끓인 설렁탕, 우유에 쌀가루를 곱게 갈아서 만든 타락죽과 순대 등을 들 수 있다.[3] 또 몽골식 버터인 수유(酥油)도 몽골풍 중 하나다.의생활에서는 일부 남자들이 변발[4]을 하기도 했고 여자들은 예장에서 쓰는 족두리와 신부가 머리 장식으로 쓰는 산호 구슬 꾸러미의 도투락 댕기, 한복에서 허리띠를 대체하게 된 옷고름, 무관들이 주로 입고 나중에는 사대부들도 널리 입게 된 철릭 등이 몽골풍에서 유래한 것이다. 경번갑과 두정갑이 한반도에 유입된 것과 환도가 곡도 형태가 된 것도 이러한 몽골풍의 영향이었다.언어생활에서는 당시 몽골어와 원나라시대 중국어가 어원인 단어들이 몇 가지 남았는데, 임금님의 밥상을 부르는 수라, 장사치나 벼슬아치 등과 같이 어미에 -치(赤)를 붙이던 것도 이 때부터다
31323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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