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클래식 음악의 작품번호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음악에서 작품번호란 기본적으로 ‘악보가 출판된 순서에 따라 매겨진 번호’로서, 대부분 ‘op.’가 많이 쓰이고 있다. ‘op.’는 라틴어 ‘opus’의 약자이며, 한글 발음으로 읽을 때는 ‘오피’, 또는 ‘오퍼스’라고 읽는다.그런데 ‘op.’ 말고도 여러 종류의 작품번호들이 쓰이고 있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감상에 입문하시는 분들께서 다소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op. 이외의 여러 작품번호명을 쓰고 있는 작곡가들의 작품번호들과 그 용어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할까 한다.▶ 첫 번째로 소개할 작곡가와 작품번호는 베토벤의 ‘WoO’이다.베토벤의 경우에는 주로 ‘op.’ 번호를 쓰지만, ‘WoO’라는 번호도 쓰는데, 이는 ‘Werke Ohne Opuszahl’의 약자로 ‘작품번호가 없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Works without Opus number’ 정도가 되겠다.워낙 유명한 작곡가라서 그런지 베토벤의 작품에는 op.와 WoO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작품번호가 붙는데, 자세한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도록 한다.▶ 두 번째로 소개할 작곡가와 작품번호는 베토벤과 함께 ‘독일의 3B’라고 불리는 바하(J. S. Bach)의 ‘BWV’이다.바하는 살아생전에 자신의 악보를 출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op.’ 번호는 쓰지 않는다. 바하의 작품은 ‘BWV’로 표기되는데, 그의 작품 목록을 정리했던 사람은 독일의 음악학자인 ‘볼프강 슈미더(Wolfgang Schmieder)’이다. ‘BWV’를 풀어서 쓰면, ‘바하(B)의 작품(Werke) 목록(Verzeichnis)’이라는 뜻이다.▶ 세 번째로 소개할 작곡가의 작품번호는 모차르트(W. A. Mozart)의 ‘K’이다.모차르트의 음악에는 ‘K’, 또는 ‘KV’라는 작품번호가 붙는데, 이것은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구하던 ‘쾨헬(Ludwig von Köchel, 1800-1877)’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며, ‘KV’라는 번호명은 ‘Köchel Verzeichnis’, 즉 ‘쾨헬의 목록’이라는 뜻이다.쾨헬은 식물학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한 학자이며 기사 작위까지 받은 사람으로서, 최초로 모차르트의 작품을 시기별/장르별로 정리한 인물이며, 그가 정리한 ‘쾨헬 카타로크’는 그의 나이 62세 되던 1862년에 발표되었다.필자가 매우 사랑하는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가 K.622번이고, 레퀴엠은 K.626번이다. 무려 600곡을 훌쩍 뛰어넘는 그의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니, 모차르트 연구 분야에서 쾨헬의 공로가 어마어마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소개할 작곡가의 작품번호는 하이든(J. Haydn)의 ‘Hob’이다.‘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하이든(1732-1809)은 ‘악성 베토벤’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며, 고전 소나타 형식을 완성한 인물이다. 하이든의 작품은 ‘op.’번호와 함께 ‘Hob’이라는 작품번호도 있는데, 이 둘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하이든의 작품에 붙은 ‘op.’ 번호는 출판된 순서이며, ‘Hob’ 번호는 작곡된 순서대로 나열된 것이다.‘Hob’은 이탈리아의 학자인 ‘호보켄(Antonio van Hoboken, 1887-1983)’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작품번호이다. 호보켄은 하이든의 작품을 장르별로 분류해서 정리했는데, I, II, III, IV, V 등 로마숫자로 대분류를 하였다.예를 들어 필자가 애정하는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은 ‘Hob. VIIe: 1’로 표기된다. 대분류(로마숫자)인 VII번은 ‘협주곡’을 뜻하며, 협주곡 중에서도 ‘트럼펫’은 ‘e’라는 소분류명이 붙기 때문이다. (a는 바이올린, b는 첼로 등 악기별 세부 분류가 있다)오늘은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2번을 감상하도록 하겠다. 이 곡의 작품번호는 ’Hob. VIIb: 2’라고 붙는다. 위의 내용을 적용하면, VII은 ‘협주곡’을 뜻하며, ‘b’는 ‘첼로’를, ‘2’는 2번임을 나타낸다.
Q. 고려후기 건축양식인 다포식 건물의 대표적인 건물은 어떤게 있는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다포계의 초기적 양식을 보여 주는 것은 위에 예시한 건물 외도 봉정사 대웅전, 성불사(成佛寺) 응진전(應眞殿), 개성 남대문, 평양보통문(普通門), 서울 남대문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들의 특징으로는 내외출목수를 같게 한 예가 많고 첨차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으나, 그 끝이 원형의 곡선이라기보다는 ≪영조법식≫의 권쇄법(卷殺法)에 따라서 모를 죽인 듯이 끝을 수직으로 깎아내려 밑에서 몇 번 곡을 두어 깎아굴렸다.또, 대부분의 경우 첨차 위에는 공안(栱眼)을 깎아 고식(古式)을 나타내고 있으며, 살미[山彌] 바깥 끝의 쇠서[牛舌]는 하앙재(下昻材)와 같이 밑으로 처져 끝이 무디게 잘려져 있고, 두공(頭工) 살미의 내부 끝은 교두형으로 이루어져 양봉(樑奉)의 초가지 문양을 하지 않고 있다.
Q. 조선 말기 광혜원은 어떤 성격의 기관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처음 명칭은 국립 광혜원(廣惠院)이었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총체적인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의료 근대화도 구상하였다.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고, 1884년 정부 신문인 『한성순보』의 사설을 통해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1884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때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이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서양의술로 살림으로써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이 가속화되었다.고종은 알렌의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 2월 29일(음력)[4월 14일(양력)] 광혜원(House of Extended Grace)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한성 재동주1에 설치된 국립병원이었다.건물은 홍영식(洪英植)의 집(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을 쓰게 하였는데,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2주일 만에 백지화되고, 그 해 3월 12일(음력)[4월 26일(양력)]에 새로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원 당시부터 소급 적용하였다.제중원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하루에 최고 70명의 환자를 보게 된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환자의 수가 늘어나서 진료업무가 복잡하게 되자 알렌은 한때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 스크랜턴(Scranton, W. B.)의 도움을 받기도 하다가, 곧 추가로 파견된 선교의 헤론(Heron, J. H.)과 함께 진료에 종사하였다.188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여의(女醫) 엘러스(Elless, A. J.)가 파견되어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여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이렇게 제중원의 진료업무가 더욱 번창하자 1887년 초 조선 정부는 한성 남부 동현의 왕실 소유 부지(지금의 을지로 입구와 2가의 중간, 구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제중원을 옮겼다.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떠나게 되자 제중원의 진료업무는 헤론이 전담하게 되었고, 부인부의 여의는 엘러스가 혼인하게 됨에 따라 호르톤(Horton, L. S.)으로 교체되었다.그 뒤 알렌이 돌아왔으나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으므로 병원진료는 하지 않았고, 1890년 여름 헤론이 병사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빈턴(Vinton, C. C.)이 의료업무를 이어 맡다가 1893년 다시 추가로 파견된 에비슨(Avison, O. R., 魚丕信)에게 인계되었다.제중원은 1885년 국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활동을 한 이래, 1894년 6월 갑오개혁의 행정관제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여 종두(種痘)주2 및 의약 · 전염병예방업무 등을 맡게 하면서 7월 18일 내무아문으로 폐합되었다.이후 에비슨은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들의 부패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어 정부에 쇄신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권리를 에비슨에게 맡겨 설립한 지 9년 만에 경영권도 완전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었다.그리고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에비슨에 의하여 1899년 제중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한편 1886년 3월 29일, 서양의학을 교육하고 양의(洋醫)를 양성하기 위한 국립 제중원의학당이 개교했다. 아울러 1886년 5월 미국 의사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알렌과 헤론에게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이 하사되었다.조선 정부는 건물과 예산을 제공하고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제중원 의사 알렌은 교수들을 섭외하고 교육에 필요한 의학도구 등을 준비했다. 본과 학생은 12명이었으며 영어, 화학, 해부, 약 조제법 등을 배웠다.그러나 제중원의학당에서 정식 졸업생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못했고, 1893년 에비슨이 내한하면서 의학교육이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