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후기 임노동자가 출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 임노동자의 출현(1) 유민의 증대와 대책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농촌사회에도 영향을 주어 농민층 분화를 촉발시켜서 농민층이 부농과 빈농의 양극으로 나뉘었다. 즉 토지의 상품화, 경영의 확대, 상업적 농업 등을 통해 양반관료·토호들은 더욱 더 많은 토지를 집적해갔고, 일부 경영형부농들도 재화를 축적하여 지주층으로 성장해 갔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의 성장에 희생되어 대부분의 농민들이 몰락의 길을 재촉받았다. 이에 더하여 고율소작료와 불합리한 지주·전호관계 등으로 인한 지주적 생산구조의 모순과 부세수취구조의 모순, 세제운영상의 폐단 등 봉건정부의 착취는 더 이상 그들을 토지에 묶어 두지 못하였다. 농민층의 분해는 17·18세기를 통해 인구가 크게 증대함으로써 더욱 촉진되었다. 자료의 신빙성에 다소 의문이 있다고 하여도 기록에 의하면, 인조 17년(1639) 150여만 명이던 인구수는 효종 2년(1651) 200만 명을 돌파하고 현종 7년(1666) 400여만 명을 기록하더니, 숙종 4년(1678) 500만 명을 넘어서고, 숙종 19년에는 700만 명을 상회하였다.0301) 급속도로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조선 후기 상품유통경제가 활성화되고 그리하여 도시가 발달하여 도시로의 농촌인구의 이동이 두드러지게 전개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전국 인구의 태반은 농촌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17세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런데 일자리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농촌에서는 노동력 수요가 감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인구의 증대로 인한 노동력의 과잉공급은 농민들로 하여금 더욱 농토에서 유리하게 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노동력밖에 생활수단이 없는 無田農民들은 이앙법의 보급, 경영의 확대로 소작농조차 여의치 않게 되자 임노동자로서 삶을 영위해야 했다. 그들은 우선 농촌에서 고용기회를 찾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자 도시나 광산·포구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헤매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도시·광산·포구 등에서는 그들에게 고용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농토에서 방출된 직후에는 고용기회를 얻지 못하고 유리걸식해야만 했다. 그들은 노동력의 수요가 창출됨에 있어서는 고용예비군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당장은 정처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고, 집단적으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전국을 헤매야만 했다.0302) 유리걸식하는 流民 현상은 비단 조선 후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흉년이나 전염병, 그리고 탐관오리의 수탈이 심하여 견딜 수 없을 때는 언제라도 보여지고 있었다. 防納 등으로 인해 가혹한 貢賦의 부담을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은 16세기말 대대적으로 유랑의 길을 나선 바 있다. 그리하여 고향을 떠나 타향에 가서 토호의 소작인이 되어 호구를 강구했는데, 선조 16년(1583) 황해도 순무어사 金誠一의 보고에 의하면 큰 고을엔 수백 명, 작은 고을도 80∼90명 이상의 유민이 생겨나고 있다고 하였다.0303) 17세기에 이르러 그 경향은 심화되었는데, 인조 때 趙翼의 보고에 의하면 마을마다 유민이 태반을 차지한다고 하였다.0304) 18세기에 이르면 그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숙종 37년 전라도 務安지방에서는 5천 호 가운데서 2천 호가 떠났고, 경종 3년(1723) 평안도 龜城 고을에는 8천 호 가운데서 남아 있는 호수가 3천 호도 되지 않았다.0305) 영조 5년(1729) 충청도와 평안도 일대에 가뭄이 계속되면서 46만여 명의 飢民이 발생하였다.0306) 고향을 떠난 유민·기민들은 대개 서울을 비롯한 도시로 모여들어 행랑살이로 고역에 시달리거나 품팔이로 연명하기도 하였지만, 산 속이나 바닷가로 찾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경종 3년(1723) 평안도 昌城지방에는 수많은 외지의 유민들이 산 속에서 화전을 일구고 있었고, 전라도 바닷가, 섬에도 많은 유민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정착촌을 만들고 있어 정부에서는 새로이 고을을 설정하자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었다.0307) 유민들의 상당수는 서울로 모여들었다. 서울에서 인구가 급증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다. 효종 8년(1657) 8만여 명이던 서울의 인구수는 현종 10년(1669) 19만여 명으로 늘어나, 2배가 넘는 급속한 인구증가 현상을 보였다. 이는 인구조사에 다소 의심이 가게 하는 사실이지만, 유민의 서울 집중은 이 시기에 연중행사처럼 전개되고 있었다.0308) 서울에는 그래도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봉건정부가 미봉적으로 실시하던 구휼책도 서울이 우선이었기에 호구지책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유민들은 서울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하면서 변두리의 龍山·西江·麻浦·뚝섬·왕십리 등지에 집단거주지를 이루어 갔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서서는 이같은 城外 지역주민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농촌에서 들어온 유민들이 서울 변두리에 정착한 결과였다. 서울은 15세기 이래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로서 전형적인 중세 봉건도시였지만, 18세기를 전후하여 상품화폐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전국의 물산이 집산되는 대상업도시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물산이 하역되는 곳은 용산·서강·마포·뚝섬 등의 京江浦口였다. 따라서 대량의 상품이 하역되는 이들 포구에는 물건을 운반하고, 지키고, 하역하는 등의 일이 끊일 새 없이 있었다. 농촌에서 쫓겨난 유민들이 정착할 수 있게끔 고용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0309) 그런데 농민의 이농과 유민의 증대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우선 그것은 사회현상적으로도 불안한 정국을 조성하고 있었다. 유민들이 집단적으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시로 모여들어 걸식하는 부랑아가 되거나 산 속에 모여 도적이 된다는 것은 일반 주민들에게는 불안의 요소로 작용하였다. 대규모의 기근이 휩쓸어 굶주린 사람들이 자식을 버리거나 심지어 人肉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였다.0310) 이는 정치도의상으로도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구나 民本과 仁政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왕조의 위정자들로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과제였다. 이 때문에 봉건국가로서도 일찍부터 義倉·常平倉 등을 설치하고 구호활동을 실시하였으나, 조선 후기의 국가 재정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봉건지배층도 자신들의 권력다툼에만 혈안이어서 민생문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시책이라는 것은 미봉적일 수밖에 없었다. 즉 농민의 부세 부담을 일시적으로 연기하거나 감축시켜 주고, 기근이 특히 심할 때는 納粟策 등을 실시하여 부민들의 양곡을 수집함으로써 기민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거나 죽을 쑤어서 먹여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0311) 한편 유민의 증대는 궁극에 가서는 범죄를 유발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살길이 막막한 일부 유민들은 법을 초월하여 자신의 생존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당시의 도적들은 거의 굶주린 농민들이었다. 따라서 자연발생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말세의 도래, 變亂의 예고 등 근거없는 秘記·圖讖이 널리 유포되면 상황은 급박해진다. 18세기에는 사회 불안이 심화됨에 따라 각처에서 보다 공격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즉 도적들 중에는 무기를 휴대한 火賊이나 水賊도 있었는데, 그들은 점차로 집단화 하는 경향을 띠었다. 유민임을 자처한 도적 집단도 있었으니, 流團이 그것이다.0312) 이 시기 대표적인 도적으로는 張吉山의 무리가 유명하였다.0313) 이에 대하여 봉건정부는 무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토벌하려 하였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근본적인 대책이 없는 한 유민의 발생은 불가피하였고, 나아가 도적들의 횡행 역시 불가피한 것이었다. 유민의 증대는 봉건적 체제의 유지와 관련하여서도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조선사회는 봉건사회로, 사회 구성의 물질적 토대는 토지에 있었다. 따라서 전국의 토지를 장악한 봉건국가는 농민을 수취의 기본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농민의 토지에서의 이탈은 비록 그들이 무전농민이었다고 하여도 봉건체제의 토대를 동요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그러한 현실을 묵과할 수 없게 된 위정자들은 수취체제를 다소 조정하고, 賑恤정책을 표방하면서 농민들을 무마하는 척하면서 농민을 토지에 얽어매고자 하는 정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즉 종래 시행된 바 있던 號牌法, 5家作統法을 강화하여 농민들이 농토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법제적으로 통제하였다. 그리고 각 고을 수령들에게 책임지고 유민을 쇄환하도록 강력히 독촉하였다.0314)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고식적이고 미봉적인 대책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게끔 역사적 현실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확실히 조선 후기의 유민현상은 그 원인과 상황이 전과 달랐다. 조선 전기에는 봉건적 착취나 자연재해가 주로 유민을 발생시켜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전에는 고향에서 유리하게 되면 타향에 가서 소작을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그 곳에서 계속 정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민이라 하더라도 생산수단인 토지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봉건적 수탈, 자연재해의 압박뿐 아니라 토지소유구조의 모순, 상품화폐경제의 농촌침투, 농촌노동력의 과잉증대, 농업기술과 경영의 변화 등으로 인해 농촌사회의 분해가 이루어지면서 유민이 형성되고 있었다. 즉 농업노동력의 수요에 비해 농업노동자의 공급이 초과되는, 농촌사회 내부에서의 분해 작용으로 유민화가 촉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고향을 떠나 타향에 가더라도 그 곳이 농촌이라면 고용의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Q. 한국에서 옛부터 전해져내려오는 독특한 단위가 뭘까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표준척의 종류와 길이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길이의 제도는 10을 1분(分)으로, 10분을 1촌(寸)으로, 10촌을 1척(尺)으로, 10척을 1장(丈)으로 하는데, 주척(周尺)을 황종척(黃鍾尺)에 비교하면 주척 1척은 황종척의 6촌 6리이고
Q. 조선시대 중인층과 서얼의 신분 상승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중인층의 사회적 제약과 신분상승 운동 (1) 서얼 - 서얼은 양반의 소생으로 인구비중은 높았으나 성리학의 명분론에 따른 서얼금고에 의해 전문기술직 이외에는 벼슬길이 법제적으로 막혀 있었다. - 양반중심 사회구조에 가장 먼저 도전을 시작하였다. - 서얼통청운동(청요직 진출)을 전개하여 정조 때 정유서얼허통절목을 발표를 계기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 서얼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다. - 1851(철종2년) 신해통공조치로 사관등용에 조치가 취하여져 서얼 문과 합격생의 승문원분관이 허용되어 완전한 청요직허통이 이루어졌다. (2) 중인(기술관, 서리) - 중인은 인구 면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 중인은 법제상으로는 문, 무과 응시가 가능하고 문관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으나 중인과 서얼은 전문기술직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중인과 동류로 취급되어 천대를 받아 실제로는 청요직 임용이 막혀 있었다. - 가계를 정리하여 족보를 만들었고, 서얼허통에 자극받아 1850년 대대적인 연합상소운동을 벌였으나 그 세력이 미미하여 실패하였다.2. 중인 계층의 성장 : 지위를 상승시키고 양반으로 진출하는 것이 확산되었고, 향촌사회에서 재력을 이용하여 향안에 오르기도 하고 나아가 수령과 밀착하여 기존의 재지사족의 권위에 맞설 정도로 성정하고 있었다. (1) 중인들의 성장과정 - 17세기 : 신분 고착화에 따른 비분강개로 표현되는 의식화 과정이 진행됨 - 18세기 : 직접 신분상승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적, 문화적 영역을 확대하는 시기 - 19세기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상한 북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받아들이고 시인이나 문사로 자족하던 문화적 자기표현에서 경사까지 아울러 학습하여 지적 역량을 확대함으로써 士로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 개항 이후의 중인 : 서구의 근대문물을 수용하는 데 양반보다 앞서 나갔고,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급진적 개화파가 대부분 중인층에서 나왔으며 뒷날 친일파가 많이 나타났다. 이것은 중인이 전문가로서의 공리적 출세지향적 기질과 관련이 있다. (2) 의관, 역관, 산관, 운관, 화원 등의 중인 계층 - 특히 수령으로 진출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의관 같은 중인들은 일정기간을 근무한 후에는 동반으로 올려주거나 간혹 공로에 따라서 수령 등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 조선 후기를 중심으로 중인출신 수령은 217명 이상이 347개 관직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 중 의관출신이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역관, 주학(=산학), 운관, 화원출신의 수령이 있었다. 화원은 임금의 초상을 그린 공로로써 특별한 은총으로 수령에 제수되었으나 그 때마다 양반들의 혹평을 받았다.3. 중인 계층의 신분상승 운동 (1) 세 갈래의 신분상승 운동 - 이들의 신분상승 운동은 상호 밀접한 연계선상에서 상호 지지와 경제적 지원을 통해 연대 발전하고 있었다. ① 서얼들이 주도하는 정치운동 성격의 통청운동 ② 기술직 중인들이 주도하는 경제운동 - 한의사, 통역관 등 기술직 중인은 그 직업적 특수성에 힘입어 새 시대에 각광받는 직업적 전문성으로 신분상승의 중요한 요인인 재력의 토대를 닦았다. - 연행사의 수행원으로 사무역에 종사함으로써 막대한 축재를 한 거부가 출현하였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승업은 이러한 부자로 실존 인물이었다. - 이들은 중인 계층의 최상층으로서 지하경제를 좌우하면서 재정적 후원자의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③ 서울의 이서리층인 경아전들이 주도하는 위항문학운동 - 18세기 후반 규장각 서리가 중심이 되어 위항문학운동을 대대적으로 확대시켜나가 18세기 말 옥계시사는 위항문학운동의 정점이었다. (2) 정부나 양반사대부 계층의 대응 - 기술직 중인의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지하경제를 촉진시켜, 국가 경제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반체제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 서얼층의 통청운동은 당초 이들이 신분 하락시켰던 근본 의도가 양반 사대부층의 특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도태 작업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원인 무효를 겨냥하는 위험 부담으로 여겨졌다. - 이서층인 경아전 중심의 위항문학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방향성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중인계층의 사회운동에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인하였다. 나아가 양식있는 사대부들은 문화의 저변확산이라는 점에서 적극 후원하였다. 이는 문화국가라는 기본 전제에서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한 조선 후기 사회가 18세기 영 ∙ 정조시대 문예부흥기를 이루어잰 대세와 표리관계로 그 맥락을 함께 하는 현상이었다. (3) 의의 - 특히 중인 중에서도 역관들은 청과의 외교 업무에 종사하면서도 서학을 비롯한 외래문화 수용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여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추구하였다. - 이들 중간계층의 활동은 농민들의 움직임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양반사대부계층에 대체되는 사회세력으로 성장하여 갔다. (4) 한계 - 기술관료라는 체질적 한계성으로 인하여 자기 학문화하였던 북학을 방법론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사회변혁세력화에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 북학사상을 완전 체득하고 새로운 사회의 이념 창출이나 방향성 제시에까지 이르려면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였는데 일제의 강점으로 그 역동성은 좌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