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1948년 10.19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 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동족상잔결사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봉기했습니다.군인의 봉기는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불만이 고조되었고 지역 주민의 항쟁으로 발전, 정부에서 강력한 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으며 국가보안법 등을 제정해 국민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반공체제를 구축했습니다.제주 초토화 작전을 위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 14연대 출동명령이 하달, 제 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합니다.제 14연대 군인은 제주도 출동명령을 국군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부당한 명령으로 간주, 여수 순천 10.19사건은 군과 경찰의 알력도 작용했으나 직접적인 원인은 제주 애국인민을 무차별 토벌하라는 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기인했습니다. 제 14연대 제주도 토벌 충동 거부 병사위원회는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이란 성명에 동족상잔 결사반대 , 미군 즉시 철퇴를 강령으로 발표, 자국의 군대에 자국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의 부당함과 이에 직접 연관이 있는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제 14연대 군인을 중심으로 봉기가 발발하자 여수에서는 1948년 10월 20일 오전 여수군 인민위원회가 재조직되었고 오후에는 인민대회를 개최, 인민대회에서 결의안 6개항을 발표하고 여수 시내 모든 행정기관을 인민위원회가 접수, 여수 순천 10.19사건 발발 후 여수 지역에서만 유일하게 인민위원회가 초보적이나마 행정이 이루어졌습니다.정부는 1948년 10월 21일 미국 임시군사고문단의 주도 아래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 토벌작전에 나섰으며 정부와 미군 임시고문단은 신속히 토벌한다는 목표를 설정합니다. 1948년 10월 22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의 지휘 아래 4F전술을 전개, '찾아서 고정시킨 후 , 싸워서 끝낸다'는 무차별적인 토벌작전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의 피해로 이어졌습니다.군인의 봉기는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만이 고조되었던 지역 주민에게 항쟁의 도화선이 되는데 특히 경제적 불만이 최고조에 달하던 민중이 호응하고 지지하면서 전남지역을 비롯해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까지 확산, 1948년 10월 20일 새벽 봉기군은 여수 시내로 진출 후 순천 방면으로 북상해 오후에 순천 시내를 장악하고 지리산 방면으로 북상하려하나 토벌군과 전투에 패하고 지리산, 백운산 등으로 입산해 1955년까지 빨치산 투쟁이 전개됩니다.이승만은 여수 순천 10.19사건을 계기로 반공국가 건설을 명분으로 한 장기집권을 위해 사회를 재조직하고자 하며 그 일환으로 국군 내 좌익세력을 척결하는 숙군으로 삼아 반공 군대를 정화하려 했고 경찰은 인력을 증가해 국민의 생활 속에 파고들게 했습니다. 교육계도 좌익 교사와 학생을 축출하도록 조직, 학도호국단을 결성해 군사훈련을 일상화했습니다.그 결과 1948년 국가보안법, 1949년 계엄법을 제정,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주권재민의 헌법적 가치가 통치권자의 권력에 의해 침해되고 억압되는 반민주주의 악법으로 활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