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내년부터 문화재를 국가유산체계로 바꾼다고 하는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가유산기본법은 문화재를 국가유산으로 변경하고 이에 맞게 제도를 정비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문화재는 1950년 제정한 일본의 문화재보호법에서 인용한 용어로 그동안 문화재라는 명칭을 사용해 재화의 개념으로 한정되었으나 앞으로는 유네스코 체계에 맞춰 문화유산, 자연유산, 무형유산으로 세부 분류하고 이를 통틀어 국가유산으로 부릅니다.이에 따라 기존의 문화유산을 지정, 등록문화재 중심으로 보호하던 것에서 미래의 잠재적 유산과 비지정유산들까지 보호하는 포괄적 보호체계로 전환, 보존, 관리 중심에서 활용, 향유, 진흥 정책으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유산 정책이 추진됩니다.
Q.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0.26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 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한 사건입니다.1972년 시작된 유신체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의 악화를 가져왔고 1인 장기집권에 대한 강압통치와 대외적으로 한국의 인권상황의 개선을 종용한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불화 등 정치, 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해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그해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19일 부산에 비상게엄령이, 20일 경남 마산, 창원에 위수령이 발동, 더욱이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부마사건의 처리문제로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10월 26일 만찬 도중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 이에 대해 3가지 설이 있는데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의 강경노선이 채택되자 그의 견제로 김재규가 진퇴위기에 몰렸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고 미국의 음모라는 설, 김재규의 우발적인 살인이라는 설 이 있습니다.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전두환 정권이 수립됩니다.
Q.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누구이며, 로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BC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 1회 3두동맹을 맺고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BC59년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에 취임, 콘술로서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크게 민중의 인기를 얻었고 BC58년부터 속주 갈리아의 지방장관이 되어 BC50년까지 재임 중 이른바 갈리아 전쟁을 수행, 그 동안 갈리아의 평정만이 아니라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땅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 영국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 했습니다.BC52년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 아래 갈리아인의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이것도 진압해 일단 갈리아전쟁은 종지부를 찍고 평온을 찾았고 , 오랜 갈리아전쟁은 그의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 BC53년 크라수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쓰러지자 제 2회 3두 정치는 붕괴되고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받은 폼페이우스와도 관계가 악화되어 출동합니다.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BC49년 1월,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BC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이를 격파합니다.후 패주하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향했으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 전 폼페이우스는 암살을 당했고 , 카이사르는 그 곳 왕위계승 싸움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발발합니다.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습니다.BC 47년 9월 소아시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대왕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격파,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의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를 원로원으로 보냈으며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속주인 아프리카 탑소스에서 소탕하고 오랫동안 공화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원로원 지배를 완전히 타도합니다. 다시 BC45년 3월 에스파냐의 문다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승리함으로 BC49년 이래 내란의 막을 내렸습니다.이로써 1인 지배자가 된 그는 각종 사회정책, 역서의 개정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그에게 부여되나 이와 같이 권력이 한 몸에 집중된 결과 왕위를 탐내는 자로 의심을 받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주모자로 하는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