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12.12사태의 발생 원인과 결과는 어떻게 된건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건의 발단은 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나 박정희가 사망 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간에 사건 수사와 군 인사 문제를 두고 갈등이 있었는데 ,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 주장,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합니다.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합니다.군사반란이 성공하자 신군부는 빠르게 정권을 장악, 전두환은 대장,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대통령에 이르렀고 노태우는 대장, 내무부 장관을 거쳐 대통령을 지내고 군사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인원들도 요직을 차지합니다.이 사건의 성공으로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 민주헌정을 중지시키고 순정으로 회귀하려했으며 이에 많은 국민과 정치인이 저항 운동을 펼쳤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Q.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신군부에 진압되고 민주화 운동과 함께 반미 운동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 , 이후 호남 전역에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높아집니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보도를 의무화하도록 언론을 장악, 조종했는데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 관련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한민국 내 언론이 미국이 신군무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집압을 승인했다는 보도를 쏟아내자 학생운동권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