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Yh무역회사사건은 어떠한것인지?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YH무역은 1966년 10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만인 1970년 종업원 3000명의 대한민국 최대 가발업체로 급성장합니다. 그러나 회사 창립자 장용호 회장과 그 동서인 진동희 사장이 경영하면서 미국으로 외화를 반출,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고용, 노골적인 불법해고, 부당전직 및 전출, 감봉 등의 행위를 자행합니다.회사의 처사에 견디지 못한 가발업체 여성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는데 1975년 3월 담당 감독의 독단적 인사이동 등 제반 문제로 건조반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 이를 계기로 5월 24일 전국섬유노조 YH지부를 결성, 이에 앞서 회사는 건조반 조장이었으며 YH 노동조합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김경숙, 박금순,이옥자, 전정숙 등을 해고, 최고참인 최순영은 강원도 하청공장으로 출장 명령을 내립니다.회사의 방해로 설립 신고를 한 달만에 겨우 마친 노동조합은 조직 강화 활동과 사내 질서 안정을 기한다는 취지로 대의원대회를 비롯해 기숙사 자치회 구성, 소그룹활동, 교육, 수련회 등을 가지며 회사와 지속적으로 노사협의를 시도, 노조는 1975년 12월 50% 상여금 지급을 성취하나 회사의 경영상태는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악화되어 은행 부채가 급증 , 이에 회사는 공장 이전, 위장 휴업 등으로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 합니다.이에 노조는 1978년 5월 9일 제 3차 정기대의원대회를 개최, 회사의 위장 휴업등을 지적하며 농성에 돌입, 그러나 1979년 3월 29일 회사는 결국 부채와 적자 운영,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 등의 이유를 제시하며 4월 말로 폐업한다는 공고를 붙였고 이에 노동자들은 4월 6일 긴급대의원대회를 개최해 회사 정상조업을 위한 대책과 사업장 폐쇄가 불가피한 상황에 대한 대비, 타업체의 인수 및 고용승계 등 대책을 협의하기로 합니다. 노조는 결의문을 통해 폐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극한투쟁도 불사한다 경고, 회사나 관계 기관들은 회사정상화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에 노동자들은 7월 25일 긴급대의원대회를 열어 7월 30일까지 정상화 해결이 없으면 조합원 총회를 열기로 합니다. 7월 30일 까지 아무런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았고, 이에 노동자들은 조합원 총회를 열고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야간 농성에 돌입합니다.노동자들은 주간 조업, 야간 농성이 계속되던 가운데 8월 6일 회사는 일방적으로 폐업 공고를 내고 7일 기숙사 식당 폐쇄, 퇴직금, 해고수당을 8월 10일까지 수령하지 않으면 법원에 공탁한다 공고, 이에 노동자들은 야당인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이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신민당사를 집회 장소로 내주는 한편 당직자들을 동원해 주변을 감시하는 경찰들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여성노동자들 187명은 8월 9일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을 요구하는 농성 투쟁을 시작, 8월 10일 노동자들은 긴급결사총회를 열어 YH무역을 은행관리기업으로 인수할것과 장용호 회장을 기소할 것, 기업 정상화와 생계대책을 강구할 것 등을 결의하며 계속 농성합니다.박정희와 여권은 YH사건의 배후에 김영삼 총재가 있다고 확신했는데 신민당 당사를 40시간 동안 노조 농성자들에게 내준 것 자체가 그러며 이 와중 신민당에 내분이 이는데 조일환씨 등 신민당 간부 3명이 김영삼 총재식 당선은 무효라며 서울지방법원에 직무정지가처분 신청을 냅니다.8월 11일 새벽 2시 김효은 서울시경 기동대장이 지휘하던 1000여 명의 경찰 기동대가 101작전을 개시, 신민당사에 난입해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 작전은 23분만에 종요되지만 그 23분동안 이들을 막는 신민당원들과 집회 참가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고 마음대로 건물을 부수고 사무실로 들어가 관계자들까지 닥치는대로 연행, 이 과정에서 21살 여공 김경숙이 사망, 신민당 의원과 당원, 취재 중이던 기자, 신민당사에서 일하던 용역 , 경비들까지 경찰에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중경상을 입게 됩니다.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박권흠 대변인 까지 경찰에 폭행, 상도동 자택에 끌려나가는 수모를 겪습니다.정부는 YH무역 노조의 신민당 농성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인명진, 문동환 목사, 이문영 전 고려대 교수, 시인 고은 등 8명을 구속, 도시산업선교회를 배후로 지목했습니다.
Q. 연금술은 어떤 시대와 문화에서 주로 발전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연금술은 고대 이집트에서 황금을 만드려는 시도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의 이론들을 만나게 되며 정교화되었습니다.10세기 무렵 코르도바의 칼리프에 의해 코르도바에 연금술이 유행하면서 카발라적 개념이 들어왔고, 12세기 무렵 휴고와 같은 학자에 의해 유럽으로 수입되었습니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후원 하에 동로마 제국의 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이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헤르메스 문헌을 수입 , 번역하면서 또 금속 활자의 등장으로 연금술서가 많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마법과 함께 유럽 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연금술은 근현대 화학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연금술 연구를 통해 현대 화학에서 쓰이는 증류, 정제 기술이나 실험 도구의 발명으로 화학 연구의 기초를 쌓았으며, 1980년대 화학사가들의 연구에 의해 재평가 받는데 이들은 연금술과 이의 영향을 받은 화학적 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현대 화학에 쓰이는 단어들이 정립될수있었다고 평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