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h무역회사사건은 어떠한것인지?
안녕하세요? 우리나라에서 1978년에 yh무역회사사건이라는게 일어났다는데요,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그 배경을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YH 무역 농성 사건은 1979년 8월, YH 무역회사의 노동자들이 회사의 폐업에 반발하여 신민 당사에서 농성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당시 YH 무역회사는 국내 최대 가발 수출업체로 성장했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 수출 둔화와 무리한 확장으로 경영난에 빠졌습니다. 이에 노조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나, 회사와 정부가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자 노동자들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감행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공권력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강제 연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 양이 추락하여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YH 무역 농성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문동환 인명진 등 8명이 구속되었으며, 이 사건은 부마민주항쟁과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 사건 등으로 이어져 유신 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켰습니다.
안녕하세요. 이태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YH무역사건은 1970년대 노동자 억압을 통한 경제성장의 한계를 드러낸 대표적 사례입니다.
YH무역주식회사는 1966년 설립되어 가발수출업체로 급성장한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린 여성 노동자들은 노조결성을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75년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됩니다.
1979년 3월, 회사는 적자와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를 이유로 4월말 폐업한다는 공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노동자의 정상조업과 폐업 철회 및 회사 정상화를 위한 농성이 계속되었으나, 8월 6일 회사는 일방적으로 폐업 공고를 하였습니다. YH노동자들은 야당인 신민당에 호소하였고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농성장을 방문하여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게 되면서 언론에 보도되어 여론화 되었습니다.
8월 11일 신민당사를 경찰이 진입하는 과정에서 농성중이던 여성 노동자들도 함께 진압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YH노동자 김경숙이 왼쪽 팔목 동맥이 절단되고 타박상을 입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결국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국회에서 김영삼이 제명을 당하였고 정치, 사회적 위기로 인해 부도를 맞은 기업들이 급증하면서 10월 16일 부마항쟁을 촉발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YH 무역 농성 사건은 1979년 8월, YH 무역회사의 노동자들이 회사의 폐업 조치에 반발하여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장기간 농성을 벌인 사건입니다. 당시 YH 무역회사는 국내 최대 가발 수출업체로 성장했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 수출 둔화와 무리한 확장으로 경영난에 빠졌습니다. 이에 노조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회사는 1979년 3월 폐업을 공고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Yh무역회사사건은 노동자들이 회사의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노동자 1명이 추락사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이 사건이 김영삼 의원의 제명파동으로 이어졌고 또 제명파동은 부마민중항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여는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YH 사건은 가발 수출업체인 YH 무역의 여성 생산직 노동자들이 회사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인 사건 입니다. 1979년 8월 9일부터 8월 11일 사이에 벌어졌으며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김경숙) 1명이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한 사건 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YH무역은 1966년 10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만인 1970년 종업원 3000명의 대한민국 최대 가발업체로 급성장합니다. 그러나 회사 창립자 장용호 회장과 그 동서인 진동희 사장이 경영하면서 미국으로 외화를 반출,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고용, 노골적인 불법해고, 부당전직 및 전출, 감봉 등의 행위를 자행합니다.
회사의 처사에 견디지 못한 가발업체 여성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는데 1975년 3월 담당 감독의 독단적 인사이동 등 제반 문제로 건조반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 이를 계기로 5월 24일 전국섬유노조 YH지부를 결성, 이에 앞서 회사는 건조반 조장이었으며 YH 노동조합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김경숙, 박금순,이옥자, 전정숙 등을 해고, 최고참인 최순영은 강원도 하청공장으로 출장 명령을 내립니다.
회사의 방해로 설립 신고를 한 달만에 겨우 마친 노동조합은 조직 강화 활동과 사내 질서 안정을 기한다는 취지로 대의원대회를 비롯해 기숙사 자치회 구성, 소그룹활동, 교육, 수련회 등을 가지며 회사와 지속적으로 노사협의를 시도, 노조는 1975년 12월 50% 상여금 지급을 성취하나 회사의 경영상태는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악화되어 은행 부채가 급증 , 이에 회사는 공장 이전, 위장 휴업 등으로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 합니다.
이에 노조는 1978년 5월 9일 제 3차 정기대의원대회를 개최, 회사의 위장 휴업등을 지적하며 농성에 돌입, 그러나 1979년 3월 29일 회사는 결국 부채와 적자 운영,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 등의 이유를 제시하며 4월 말로 폐업한다는 공고를 붙였고 이에 노동자들은 4월 6일 긴급대의원대회를 개최해 회사 정상조업을 위한 대책과 사업장 폐쇄가 불가피한 상황에 대한 대비, 타업체의 인수 및 고용승계 등 대책을 협의하기로 합니다. 노조는 결의문을 통해 폐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극한투쟁도 불사한다 경고, 회사나 관계 기관들은 회사정상화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에 노동자들은 7월 25일 긴급대의원대회를 열어 7월 30일까지 정상화 해결이 없으면 조합원 총회를 열기로 합니다. 7월 30일 까지 아무런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았고, 이에 노동자들은 조합원 총회를 열고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야간 농성에 돌입합니다.
노동자들은 주간 조업, 야간 농성이 계속되던 가운데 8월 6일 회사는 일방적으로 폐업 공고를 내고 7일 기숙사 식당 폐쇄, 퇴직금, 해고수당을 8월 10일까지 수령하지 않으면 법원에 공탁한다 공고, 이에 노동자들은 야당인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이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신민당사를 집회 장소로 내주는 한편 당직자들을 동원해 주변을 감시하는 경찰들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여성노동자들 187명은 8월 9일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을 요구하는 농성 투쟁을 시작, 8월 10일 노동자들은 긴급결사총회를 열어 YH무역을 은행관리기업으로 인수할것과 장용호 회장을 기소할 것, 기업 정상화와 생계대책을 강구할 것 등을 결의하며 계속 농성합니다.
박정희와 여권은 YH사건의 배후에 김영삼 총재가 있다고 확신했는데 신민당 당사를 40시간 동안 노조 농성자들에게 내준 것 자체가 그러며 이 와중 신민당에 내분이 이는데 조일환씨 등 신민당 간부 3명이 김영삼 총재식 당선은 무효라며 서울지방법원에 직무정지가처분 신청을 냅니다.
8월 11일 새벽 2시 김효은 서울시경 기동대장이 지휘하던 1000여 명의 경찰 기동대가 101작전을 개시, 신민당사에 난입해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 작전은 23분만에 종요되지만 그 23분동안 이들을 막는 신민당원들과 집회 참가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고 마음대로 건물을 부수고 사무실로 들어가 관계자들까지 닥치는대로 연행, 이 과정에서 21살 여공 김경숙이 사망, 신민당 의원과 당원, 취재 중이던 기자, 신민당사에서 일하던 용역 , 경비들까지 경찰에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중경상을 입게 됩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박권흠 대변인 까지 경찰에 폭행, 상도동 자택에 끌려나가는 수모를 겪습니다.
정부는 YH무역 노조의 신민당 농성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인명진, 문동환 목사, 이문영 전 고려대 교수, 시인 고은 등 8명을 구속, 도시산업선교회를 배후로 지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