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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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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 전문가
성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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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줄다리기의 유래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민속의 구전적 특성상 이러한 관습 시행의 정확한 연대 추정은 가능하지 않으나 그 관행이 고서에 기록된 시점과 무관하게 지역에 따라 신라 혹은 백제 때부터 구전이 존재해 고대로 존재했던 것은 분명합니다.예부터 고을간의 대항전으로 치러졌으므로 전 주민들이 참가해 축제적인 분위기 속에 줄다리기를 했고, 주로 인접한 마을끼리 경쟁을 벌이는 행사였으므로 마을 주민의 협동과 단결을 그 미덕으로 삼는 민족적인 성향이 강한 놀이입니다.특히 줄다리기를 행하는 동안 주변에서 열성적인 응원이 행해지고 농악대 등의 참여로 흥이 돋워지는 종합 축제적 성격을 가지며 이긴 마을에서는 풍년이 든다고 믿었으므로 치열한 경기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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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소서노의 아들들은 왜 각자 갈라졌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서노는 자기 아들이 주몽에 이어 왕이 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주몽이 동부여에 남겨둔 아내 예씨가 탈출, 고구려로 뱃속에 아들 유리까지 대동해서 돌아옵니다.주몽은 예씨를 왕후로 삼고 유리를 태자로 삼으려 하니 소서노는 이에 반발, 결국 두 사람 사이는 대립관계로 변합니다 .주몽은 서기 전 19년 4월 유리의 태자 책봉을 강행, 당시 주몽은 건강이 좋지 않았고 자신이 죽으면 예씨와 유리의 처지가 난감해지므로 서둘러 유리를 후계자로 지목하게 됩니다.5개월 뒤 주몽이 죽자 왕위 계승을 두고 한바탕 소란이 이는데 조정은 양분되었고, 유리와 비류는 용상을 놓고 목숨 건 혈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까지 됩니다. 그때 소서노는 결단을 내리는데, 자기 세력을 이끌고 다른 지역으로 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합니다.큰 아들 비류도 그녀의 뜻에 동조, 어머니의 뜻을 전해들은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말하길,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리에게로 돌아갔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데없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해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비류의 말을 듣고 온조 역시 망명에 동의 , 소서노는 자신을 따르는 신하, 백성을 이끌고 남쪽으로 대이동하게 됩니다.졸본에서 여러 강을 건너 남하한 소서노의 무리는 도읍을 건설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해 두 무리로 흩어지고, 한 무리는 비류와 함께 미추홀, 다른 무리는 온조와 함께 위례에 정착합니다.이 과정에서 무리가 둘로 나뉜것은 비류와 온조가 정착지에 대한 견해 차이를 보였기 때문으로, 온조는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땅인 위례를 택했고, 비류는 바닷가를 선호해 미추홀을 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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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구려 4세기 전반의 미천왕의 업적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 적군 8000명을 사로잡았습니다.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 313년 낙랑군을 공략해 적군 1000명을 사로잡아 낙랑군이 멸망, 314년 대방군을 정벌해 영토로 삼았습니다.당시 요동지역을 지배해 오던 진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력을 확장, 고구려는 영토확장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자주 충돌하므로 고구려는 진의 평주사자 최비 등과 연합해 모용부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요동지역은 모용부의 영토가 되니, 그 이후 미천왕은 요동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모용부를 공격하나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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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군대에서 권총은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엇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권총은 화승총시대부터 있었으며 작은 크기에 안전성을 부여하기 어려운 편이라 이러한 보병용 총기류는 조금 늦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됩니다.권총이라고 불릴만한 것은 핸드캐넌 시기부터 존재했는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국의 세총통 입니다.작은 총통에 화약과 화살을 장전하고 철흠자 라 불리는 집게로 집어 고정시킨 뒤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합니다.용도도 현재의 권총처럼 편리한 휴대성을 살려 호신용으로 사용하기 위한것이었으나 조선 초중기에 살짝 등장하고 이후 등장하지 않습니다.세총통은 조선 초기 조선 북방을 침입한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해 세종 14년(1432년) 최초 제작된 휴대형 총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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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에는 사자가 산적이 없다는데 전통 민속놀이에 사자탈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자는 예로부터 신성시하던 동물로 여러 탈놀이에서 사악한 것을 쫓는 역할을 맡았습니다.특히 북청사자놀이는 정월 14일 밤부터 시작했는데 놀이가 끝난 16일부터 여러 사람들의 초청을 받아 돌아다니며 잡귀를 없애주는 춤을 추었습니다.즉 초청된 집에 도착하면 마당에 들어가 춤을 추고 갑자기 앞뜰을 거쳐 안방 문을 열고 큰 입을 벌린 채 무엇을 잡아먹는 시늉을 하거나 부엌에서도 무엇을 잡아 먹는 듯 행동하며 집안의 탈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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