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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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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 전문가
성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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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에서 온돌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반적으로 기원전 4세기 옥저 시대부터 온돌이 발명되었다고 추정, 실제 구석기 시대,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온돌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형태가 발견되었습니다.고구려때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구당서에 나오며 같은 기록에 백제는 고구려와 습속이 유사하다라고 이야기 하므로 백제에서도 이미 온돌의 초기 형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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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수왕시기에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수도이전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4세기대 국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된 고구려는 대폭 늘어난 인구와 영토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며 그러기 위해 보다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습니다.국내성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린 귀족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고 왕실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도의 건설이 요청되며 이와 같은 필요성은 광개토왕 이후 점차 대두되며, 장수왕의 재위기간 동안 국제정세는 복잡했습니다.북연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쪽으로부터의 압박에서 다소 벗어날수 있었지만 그 서쪽에서 새로 일어난 북위는 고구려에게 위협적인 강적이었고,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왜가 백제와 연합하여 남방에서 분쟁을 일으켜 왔으며, 백제, 신라와 더불어 왜가 어우러진 복잡한 상황은 고구려로 하여금 남쪽지역에 대한 새로운 국가전략을 수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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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역사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 비롯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미 이전부터 중쇠의기운이 있었습니다.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와 훈구, 사림 세력간에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중앙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고군사적으로도 조선 초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하나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는 못했습니다.이이는 남왜북호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했습니다.이러할 즈음 일본에서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는데 15세기 후반 서세동점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해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입니다.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며, 그는 대마도주 소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수호하도록 시켰고 그의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는 것에 있었습니다.이에 대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등의 일행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에 보내어 통호를 청합니다.이 소식이 경상우수사의 치보로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찬탈시역 한 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접대할 수 없으니 대의로써 타일러 돌려보내라는 뜻을 비치고 2품 이상의 정신들에게 가부를 논의하도록 합니다.정신들의 결론은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것이었고 선조는 내키지 않으나 정의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치바나 일행이 서울에 올라와 바친 수교문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자 보서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도 보류하게 됩니다.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치고 조헌은 지부상소를 올려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지말 것을 극언, 그대로 해를 넘긴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588년 문무반 2춤직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중추부에 모아놓고 가부를 재론, 그 결과 바닷길이 어두워 통신사를 보낼수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다치바나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냅니다.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며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한 독촉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의 세이주사 주지인 겐소와 가신 야나가와 및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신인 시마이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합니다.선조는 구례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을 선위사로 삼아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 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며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 함께 일본으로 갈 것을 요구합니다.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하고 소 일행은 돌아갑니다.대마도로 돌아간 그들은 정사에 겐소, 부사에 소를 구성해 다시 부산포로 왔고 겐소를 정사로 삼은 것은 국왕사로 위장하려는 것으로 이들을 다시 맞이한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 사신으로부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던 터라 통신사 파견의 여부를 논의하지 않을수 없었고, 이에 정신들의 찬반이 엇갈려 결정짓지 못하던 중 왕의 전교에 따라 조선의 반민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끔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소요시키니 그들을 잡아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의 명분을 찾고 그들의 성의를 시험하고자 합니다.이에 소는 응하여 야나가와를 자국으로 보내 사화동 등 10여 인을 잡아 조선의 처치에 맡긴다 하여 이들을 모두 베어 죽였으나 이것으로도 통신사 파견을 결정짓지 못하다 보빙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냅니다.그런데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 11월 중순이 넘어 통신사 일행을 선정, 즉 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일, 서장관에 허성으로 결정됩니다.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사카이 포구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 보름만에 받았는데 내용이 오만불손해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 가져오게 되며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 이때 일본 사신 겐소, 야나가와 등도 따라옵니다.통신사 파견을 결정할 때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이고 사행이 돌아온 후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지는데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지만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고,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이라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이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한 황진도 분노를 참지 못해 부사의 무망을 책했다고 합니다.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 마저 없지 않았습니다.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을 중지, 선위사 오억령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 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파직당합니다.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해 일본의 공로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 이라 하나 이를 거절,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후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하는 것이 좋다 라고 거듭 변장에게 말하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돌아갑니다.그 뒤 왜관에 머무르던 일본인 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석각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를 수축, 한편으로는 신립을 경기, 황해도에 , 이일을 충청,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시시설을 점검,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갑니다.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전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고 이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해 연마한 병법, 무예 , 축성술, 해운술을 정비,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을 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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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신대학교라는 대학교가 있는지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신대학교는 없고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와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사립 대학인 영산대학교는 있습니다. 또, 영남신학대학교를 줄여서 영신대로 부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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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간도는 정확히 어느 지역을 가리키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간도의 땅의 위치와 영역은 과거, 현재까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일반적으로 광의의 간도는 압록강-두만강 맞은편의 한민족 집단거주지를 지칭하며 압록강 쪽을 서간도, 두만강 쪽을 동간도라 일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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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궁중 떡볶이는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떡볶이는 어떻게 다른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말기 요리책인 규곤요람과 시의전서, 음식다방에서도 떡볶이가 등장, 여기서 나오는 떡볶이는 간장으로 간을 하며 고기와 채소가 들어가는 궁중 떡볶이로 간장에 고기와 채소를 볶은 떡을 버무려 먹는 당대기준 상당한 고급 요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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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외국에서 한국을 Korea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KOREA는 고려시대 벽란도까지 교역하러 찾아온 무슬림 상인들이 고려 라는 국명을 아랍어로 쿠리야 라고 부른 것이 기원이라 전해지며, 어원이 고려 이기 때문에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나라였던 조선 때는 외국인들이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을 거북하게 여겼고, 실제 고종 때 대한제국을 Korean Empore라고 하지 말고 Empore of Dai Han 이라는 영문 호칭을 사용해주길 주한 외국 공사관에 요청했으나 무시, 결국 대한제국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 후 포기하고 코리아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조선 및 대한제국이 발행한 우표에 영어 및 프랑스어로 corea, Korea,등으로 나라 이름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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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원불교의 역사적 유래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불교는 1916년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 박중빈의 대각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1891년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릴때부터 우주의 자연현상과 인간의 만사에 궁금증이 컸습니다.20세에 아버지가 죽은 뒤 심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고행과 수도를 이어가던 가운데 1916년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의 깨달음은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는 것으로 여러 종교의 경전을 살핀 뒤 금강경에서 자신의 깨달음이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행적에 부합함으로 그것을 연원으로 삼게 되었다고 합니다.깨달음을 얻은 뒤 박중빈은 고향인 영광을 중심으로 초기 공동체를 모았고 1916년 영광군 길룡리에서 불법연구회를 조직해 8~9인을 규합한 것이 최초의 공동체로 이들은 저축조합을 함께 운영, 방언조합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습니다.1920년 영광군 묘량면 신흥마을에 수신조합을 세워 공동체를 확장, 신흥의 수신조합 역시 상조조합을 겸하여 경제적으로도 공동체를 형성, 야학 등의 교육사업으로 마을 주민들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원불교 초기 공동체는 영광 지역에서 간척사업을 하며 확대하고 있었으나 조선총독부의 신흥종교 감시 대상이 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1주일간 구금된 뒤 석방, 영광을 벗어나 전국적인 종교로 확장하기로 마음 먹었고 전주를 비롯한 여러 곳을 총부의 후보지로 물색하다 익산에 총부를 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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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인구는 얼마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매 가호에서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가족과 노비를 기록한 호구단자를 소속 군현의 수령에게 제출, 각 군현에서는 이에 기초해 호적대장을 3부 작성하여 한부는 해당 군현에서 보관, 다른 2부는 감영과 호조로 보냈는데 이로부터 전국의 호구 총수가 집계됩니다.이 호구 총수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인구는 건국 이후 15세기의 빠른 증가, 임진왜란이후 감소, 전쟁이후 17세기 급속한 증가, 18세기 정체, 19세기 감소의 추세를 보입니다.조선왕조가 파악한 인구는 1393년 30만명, 1519년 374만여명, 1861년 674만여명이며 조선왕조의 호구 총수로부터 추정한 실제 인구수는 조선왕조 건국 초 550만명, 19세기 1800만명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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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오마카세스시를 열게된 업체는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오마카세 업체는 알수 없으나 오마카세는 1990년 중반 이미 한국에 들어와있었고, 국제 호텔 체인 소속의 특급 호텔의 웬만한 일식당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오마카세 카운터석과 오마카세 식사를 제공했습니다.1990년대 중반 호텔 일식당 중심으로 퍼지게 되었으며 호텔 일식당에서 판매하는 오마카세이기 때문에 주로 중산층 이상의 직장인들이나 데이트 코스로 애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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