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링컹은 왜 흑인들의 노예해방을 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링컨이 노예해방선언을 한 이유는 여러가지로, 노예해방선언을 하면서 북군은 자유-해방전쟁의 병사가 되었고 흑인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었습니다.원래 링컨은 유예기간을 두고 적절한 금전적 보상을 거쳐 노예인을 자유인 신분으로 전환하는 것을 구상했습니다.그러나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급진적인 내용을 담아 선언하는데, 남부 진영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듬해인 1월 1일 모든 주의 노예해방을 하겠다는 것으로 해당 명령은 법적 근거가 없고 남부주에서 링컨 대통령의 선언은 이행할 이유가 없으나 이로 인해 흑인 병사가 늘었으며 2만 5천명~7만 5천명의 흑인이 북군 군사로 입대합니다.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북군 흑인은 약 20만명이 됩니다.또 다른 목적은 영국과 프랑스 개입의 차단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당시 남부를 지지, 그것은 막대한 면화의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암묵적으로 남부를 지지합니다.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는 미국이 남과 북으로 찢어지면 자신들과의 경쟁에서 미국은 도태될 것이라고 판단, 즉 경제적인 이유와 정치적이유도 있어 남부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으므로 남북전쟁이 진행될수록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이에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을 하며 영국과 프랑스 개입을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Q. 고창에 가면 고인돌이 유명한데요. 그 유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인돌은 계급 분화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 돌화살촉이나 간검돌, 민무늬 토기, 청동 제품 등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었습니다.많은 고인돌에서 부장품이 출톧되지 않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이차장 또는 세골장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추측됩니다.고인돌 이름을 논문에 처음 쓴 사람은 한흥수이며 , 한흥수는 일제강점기 때 유럽에 건너가 고고학을 전공한 우리나라 1세대 고고학자로 도유호, 손진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인돌을 연구한 학자입니다.손진태는 민속학자, 한흥수와 도유호는 유럽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전문 학자인데 두 사람은 해방 뒤 월북해 북한 고고학을 이끈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한흥수는 1935년 조선의 거석문화 연구 논문에서 우리나라 거석문화를 선돌, 고인돌 , 칠성바위, 독무덤으로 나누어 분석했습니다.
Q. 보물 1200호 마애여래좌상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은 양식으로 보면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성시기는 신라 말기,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으로 의견이 다양하고 백제 위덕왕 때 검단 선사가 새겼다는 전설이 있습니다.마애불 머리위에 네모난 구멍들이 뚫려져 있는데 그 구멍에 목재가 박혀있는 것도 있으며 이것들은 마애불의 장엄함을 위해 설치한 닫집이 있던 흔적이며, 가슴 아래 새겨진 복장을 만들 때 그 가슴에 금, 은, 칠보와 같은 보화나 서책에는 비밀스러운 기록이 숨겨져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그 내용은 복장 안에 보관된 비기가 알려지는 날 조선은 망한다는 것으로 18세기 말 전라감사 이서구가 그 기록을 꺼내보려다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본다 라는 대목만 보고 도로 넣었다고 합니다. 100여년 후 동학 농민 혁명이 움트던 1892년 동학 접주 존화중이 그 기록을 무사히 꺼내 가져갔다고 하며 당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농민들의 염원을 엿볼수 있는 전설입니다.
Q. 미디어아티스트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디어아트는 아트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도구들 중 매체적인 성격의 도구들을 주로 사용하며, 현대인들에게 쉽게 가까이 접할수 있는 매체로 사람들에게 보여줄수 있는 다양한 시각적인 관점을 제시, 보여주는 일들을 합니다.이러한 제시로 인하여 다양한 시선의 관점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다양한 사회적인 이슈와 편견, 예술작품 등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나은 예술의 관점을 향상시키고 예술작품에 대한 어려운 편견을 저하시킬수 있으며, 대중들에게 예술에 대한 인식을 조금 더 쉽게 다가갈수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예술을 현대 사회에서 조금 더 가까이 접할수있도록 하는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Q. ‘백정’은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의 용어였으며,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정은 고대부터 내려오던 한반도에 있던 계층에 대한 호칭으로 현대의 인식으로는 옛날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 파는 일을 했던 도축업자로서 조선시대에는 평민 하류에 속해 천민인 노비보다 사회적 인식이 나빴으며 조선 전기 중대한 사회문제로 취급받았습니다.그러나 도축, 발골, 정형을 담당하는 사람이 역사적으로 백정이라고 불린 것은 조선시대 세종 이후이며 그 전에는 백정은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였고, 세종 이후 백정이 다른 뜻으로 바뀐 후에도 도축업자가 백정일수는 있었지만 모든 백정이 다 도축업자는 아니였으며, 도축업자는 백정의 일부였고 백정은 도축업 외에 다른 직업군을 포괄하고 있는 다른 의미의 단어였습니다. 즉 혈통, 신분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우리가 아는 백정은 고려시대 화척이라고 불리는 무리였고, 수척, 양수척, 무자리라고 불렸던 이들은 고려 후기 화척으로 불리다 조선 초 백정이라 바뀌어 불렸으며 고려시대부터 악명 높은 범죄집단으로 떼를 지어 유랑하며 걸식, 강도, 방화, 살인 등 각종 범죄를 자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