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삼국지에서 나온 계륵은 어떤 일화로 나온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후한서 양수전에서 유래한 말로 위나라 조조가 촉나라 유비와 한중이라는 지역을 놓고 싸웠는데 한중은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한 전략 요충지로서 조조와 유비 중 누가 이 땅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서로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익주를 점령한 유비가 먼저 한중을 차지해 세력권 안에 두고 있었고 조조의 군대는 갈수록 유비 군대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전진하기도 수비하기도 곤란한 상태가 됩니다.그러던 어느날 저녁 조조에게 닭국이 바쳐졌고, 조조는 먹자 하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의 갈비가 꼭 지금의 상황과 같다고 생각, 그 때 부하가 야간 점호를 정하려고 찾아왔는데 조조가 무심코 계륵 이라는 명을 내렸고, 부하들이 무슨 뜻인지 상의하였으나 아무도 영문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주부로 있던 양수만이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짐을 꾸리기 시작합니다.사람들이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양수는 닭의 갈비뼈는 먹을 만한 데가 없다.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깝다. 공은 돌아가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라고 대답합니다.양수는 고기가 별로 없어 먹자니 먹을게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부위인 계륵과 마찬가지로 한중 지역이 버리기는 아까우나 무리해 지킬 만큼 대단한 땅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조조의 의중을 파악한 것입니다.그의 말대로 조조는 이튿날 철수 명령을 내렸고, 이 이야기로부터 비롯되어 특별히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 또는 그러한 상황을 일컬어 계륵이라 합니다.
Q. 인류는 언제부터 종이를 사용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재 사용하는 종이는 고대 중국에서 발명된 것으로 고대 중국에서는 부피가 큰 간독이나 비싼 비단에 주로 글을 썼는데 비단을 징수하는 것이 행정,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되자 당시 왕실재정을 담당하던 중국 후한의 환관 채륜이 비단을 대신할 물건을 찾게 됩니다.채륜이 전국에서 수많은 장인들과 기술을 동원해 만들어진것이 채후지로 , 기원후 105년 경 당시 중국에 있던 제지 기술을 개량, 체계화하고 공정 방식을 표준화해 만든 채후지를 현대 종이의 직계로 봅니다.채륜이 종이의 최초 발명자로 알려져있으나 실제 중국에서는 채후지 이전 이미 나무 섬유를 이용해 만든 종이의 시험작 쯤 되는 물춤들이 수십종류 이상 발굴되었습니다.
Q. 동양화'와 '서양화'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로는 자연관에서 나타나는데 동양에서는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로 보며 서양에서는 자연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또한 동양화의 경우 화선지, 비단, 먹, 먹물 등을 사용, 서양화는 종이, 캔버스, 수채화, 유화, 붓 등을 이용합니다.
Q. 실제로 항우라는 인물은 존재했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항우는 진나라 말기의 군인으로 초한전쟁 당시 후초나라의 패왕이었습니다.초나라의 부흥운동의 선봉장으로서 임하는 모든 전투에서 백전백승의 위업을 달성, 초나라의 패왕을 자칭하며 한의 유방과 천하의 패권을 두고 자웅을 다툰 인물입니다.항우는 한때 천하의 주인이었으며 그 위세는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였습니다.항우를 크게 비판했던 사마천도 항우를 본기에 등재시키며 항우가 중국의 지배자였다는 것을 확고히 했습니다.항우에게서 유래된 패왕은 역발산기개세와 더불어 항우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현대에 이르면서 패왕이라는 칭호는 너무나 강해서 힘으로 천하를 평정하는 최강의 인물에게 붙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패 라는 칭호를 그렇게 만든 것이 항우 입니다.항우 이전까지 패는 춘추오패 같이 천자를 모시는 제후 중 돋보이는 능력을 바탕으로 제후들의 회맹을 주도하는 대표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였고 이 패자들은 지도자로서 능력을 보여 패자가 된 것이지 항우처럼 군사적 능력과 힘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로 패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패왕이라는 단어가 무력과 강함을 의미하게 된 시초가 항우이며, 이 패왕을 쓴 항우가 역사의 패배자임에도 불구,2200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 최강을 상징하는 칭호로 자리매김 한 것을 보면 항우가 당시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알수 있습니다.항우가 활약하던 시대는 화기 등의 발명이 없던 냉병기 시대로, 군을 지휘하는 장군의 역량과 용맹이 군 전체의 사기와 전투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 이런 시대에 압도적인 전략적 불리함속에서도 거록대전, 팽성대전, 고릉 전투 처럼 오히려 상대방을 항상 궤멸시킨 인물이 항우 입니다.한나라 군사들은 항우가 온다는 소식만 들어도 다 이긴 전투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