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그림인 문인화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문인화는 대부분 먹을 사용해 간략하게 그린 후 엷은 채색을 하는 기법을 사용, 전문화가가 아닌 문인들의 작품이므로 아마추어적인 성격이 강하고 사물의 외형을 꼼꼼하게 그리기보다 마음속의 사상을 표현하는 사의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합니다.때문에 문인화는 일찍부터 중국에서 문인 특유의 그림으로 발전을 보게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남종화를 문인화와 관련해 분류하게 된 것은 중국 명나라 말기의 화가이자 화론가인 동기창, 막시룡, 진계유 등에 의해서 입니다.우리나라에서 문인화는 어떠한 화풍이나 화법을 지칭하기보다 화가의 신분에 의해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우리나라의 문인화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됩니다.중국에서 남종화가 성립되고 문인들의 그림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송,원대이기에 이미 고려시대 송이나 원과의 밀접한 문화교류의 결과로 남종화가 유입,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중국서화 수집가인 안평대군의 서화목록에 중국 남종화가들이 작품 제목이 적혀있어 고려 말부터 남종화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Q.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은 어떤 곳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 백화점은 화신상회 입니다.1931년 서울 종로구 종로 2가에 세워졌으며 당시 화신상회를 인수한 사람은 박흥식 입니다.지금의 백화점보다 규모가 작고 상품이 많지 않았으며, 1890년 신태화가 화신상회를 설립해 금, 은, 귀금속품을 전문으로 거래하는 상회로 운영, 1922년 양복부를 , 그 다음해 일반 잡화부를 증설해 백화점의 형태를 갖추었습니다.1931년 선일지물 사장 박흥식이 36만원에 매수해 자본금 100만원의 화신상회를 설립 후 종래 목조 2층 건물을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증개축하고 기구도 영업과, 서무과, 사입과 등을 두고 백화의 판매, 제조와 그 부대사업을 시작했습니다.1932년 7월 16일 옆 건물의 동아백화점을 인수, 합병했고 1934년 2월 27일 주식회사 화신으로 상호를 변경, 6월 연쇄점과를 신설해 상품의 복잡한 유통과정을 단순화시켜 생산공장에서 직접 다량구입해 직접 소매상에 공급하는 연쇄점사업에 투자했습니다.전국 5개 대도시에 배급소를 설치, 전국 350개 소의 연쇄점을 모집, 개점시켰으며 1935년 1월 27일 화재로 50만원의 손실이 발생하나 임시로 건물을 임대해 백화점을 계속 운영, 그해 12월 평양백화점을 인수해 화신평양지점을 개점, 1938년 진남포지점까지 개점합니다.1937년 11월 11일 화재로 소실되어 신축한 전관이 준공되었는데 종로 소재 지하 1층, 지상 6층 , 총건평 3,011평으로 이는 당시 한국인에 의해 건립된 최대의 건물로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시설이 구비, 1941년 9월 25일 선일지물, 화신연쇄점, 화신무역 등 계열회사가 통합, 화신상사 주식회사가 됩니다.1944년 11월 30일 화신에 흡수, 합병되어 총자본금이 800만원이 되지만 일본강점으로부터 8.15광복 때까지 물자부족, 품귀현상으로 화신백화점은 운영의 곤란을 받았고 1946년 12월 1일 화신주식회사에 독립해 자본금 2000만원의 화신백화점이 설립되어 물품판매업, 제조가 공업, 위탁판매 내지 대리업 등 백화점 업무를 독자적으로 운영해오다 1950년 1월 1일 다시 화신주식회사와 통합되어 자본금 3억원의 화신산업주식회사로 운영되나 6.25전쟁으로 백화점 내부의 화재와 물자부족으로 백화점 직영이 곤란해 1950년 10월부터 일반에게 임대운영하기 시작, 1955년 11월 15일 종로 1가에 신신백화점을 준공, 개점했고 1970년대 화신전기, 화신전자, 화신레나운, 화신타이거리싱 등을 설립하는 등 사업을 확장합니다.그러나 과도한 투자로 인해 1980년대 화신백화점운영의 화신산업과 계열회사 모두 해체되며 화신백화점은 건물도 서울특별시의 종로도로확장계획에 따라 모두 헐리게 되었고 다만 1947년 10월 15일 1억 500만원의 출연금으로 설립된 육영문화장학재단인 흥한재단과 1964년 6월 설립된 학교법인 광신학원이 존속되고 있습니다.화신백화점은 근대적인 규모, 시설, 조직을 갖추고 합리적으로 경영해 일제강점기에 한국상업계의 선도적인 구실을 했으며 전국적인 연쇄점을 개설하고 값싸게 물건을 공급함으로 중간상의 폭리를 배제하고 유통질서를 세웠으며 다양하고 풍부한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에도 지사를 두는 등 백화점 운영의 근대화에 기여했습니다.
Q. 고려시대 때 일반 백성 중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이 사는 특별행정구역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구역의 명칭은 무엇이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특수행정구역은 향, 부곡, 소 입니다.향 , 부곡, 소에 거주라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진 나라의 사람이라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Q. 한옥은 우리나라에 언제 최초로 만들어진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옥은 석기시대 막집, 움집같은 수혈식 구조에서 시작되어 역사 시대까지도 마한은 비슷한 형태의 주거가 이루어졌고, 다른지역에서 가야의 고상가옥, 만주같은 북부에서는 구들이 사용된 원초적 한옥 구조들이 등장했습니다.초기 백제 사람들이 큰 나무위에 집을 지었고 이는 기둥을 세우고 허공에 마루를 까는 오두막 집이었고 그 뒤 고구려인들이 이주하며 고구려의 구들과 백제의 마루가 합쳐지게 되며 현재 한옥의 특성인 구들과 마루가 합쳐진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구들과 마루가 합쳐진것을 한옥의 정형이라 부릅니다.
Q. 과거에 조선시대에 장애가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공식적인 기록에는 독질, 폐질, 잔질이라 칭하며 장애를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으로 인식했습니다.따라서 장애인들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고 직업을 갖고 자립할수있도록 권했습니다.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어떤 장애인이라도 배우고 일할수있어야 한다고 하며,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듣지 못하는 사람과 생식기가 불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이어나갈수 있다며 다리를 저는 사람은 그물을 떠서 살아갈수있지만 오직 중환자와 불구자는 구휼해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조선시대 장애인들의 대한 정책으로 가족부양이 원칙이었으며, 만약 가족이 장애인을 부양할수없을 때에는 친척과 이웃 등 마을 공동체에서 지원, 장애인에게 조세와 부역 및 잡역을 면제, 죄를 범하면 형벌을 가하지 않고 면포로 대신 받았으며 연좌제에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또 시정, 즉 부양자를 제공하고 때때로 노인과 함께 잔치를 베풀어주며 쌀과 고기 같은 생필품을 하사,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 같은 구휼기관을 설치해 위기에 처한 장애인을 구제하기도 했습니다.장애인만 가질수 있는 직업도 따로 있었는데, 점복가와 독경사, 악공 등이며 점복가는 점을 쳐주고 대가를 받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실명해 시각장애인이 되면 주로 점복을 했습니다. 관상감 소속의 명과학이라는 관직을 두어 그들은 항상 왕의 곁에 머물며 정치의 길흉을 파난, 왕실에 간택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독경사는 도교나 불교 경전을 읽어 병을 치료하거나 기우제를 지내는 것으로 시각장애인이 주로했고 악공은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내연에서 음악을 연주, 길거리에서 연주하며 구걸했으며 민간에서 병에 걸리거나 재난이 닥칠시 이들을 불러 경문을 외우게하고 대금을 지불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 악공을 위한 장악원 소속의 관현맹인 제도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