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동학운동 발생의 시대적 배경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조선 전시대에 걸쳐 수탈의 대상이 되어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렸습니다. 1894년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며 민란이 일어났습니다.민란의 직접적인 불씨가 된 것은 만석보의 개수문제에 따른 수세징수사건으로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 온 조병갑은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그는 기회있는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했는데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해 주고도 추수기에 강제로 수세했습니다. 또 부민을 체포해 불효, 불목, 음행, 잡기 등의 죄명을 씌워 그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은 것도 2만여냥에 달했으며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거둔 돈이 1000여 냥이 되며, 대동미를 정미로 받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질이 나쁜 쌀을 사 상납해 그 차액을 착복하기도 했습니다.만석보는 농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동진강에 건설한 수리시설로 이를 이용하고 있던 농민들에게 받는 수세가 너무 과중해 자주 그 경감을 청원했습니다.조병갑이 새로 군수로 부임해 오자 여기에 덧붙여 강의 하류에 필요하지않은 신보를 쌓게 하고 이를 이유로 농민들에게 고율의 수세를 징수함으로 700여 섬이나 착복했습니다.1893년 12월 농민들은 억울한 사정을 민소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로 삼아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전봉준은 동학접주인 동지 20명과 함께 각 마을 집강에게 보내는 사발통문을 작성해 봉기를 맹약합니다.그와 동시에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할 것, 군기창과 화약을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유하여 인민을 침어한 탐리를 격징할 것 ,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로 직향할 것 등의 4개 항을 결의합니다.이듬애 1894년 2월 10일 전봉준은 김도삼, 정익서, 최경선 등과 함께 봉기해 고부군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되었던 수세미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해산했고 조병갑은 간신히 난을 피해 전주에 이르러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보고하고 김문현은 이를 다시 정부에 알립니다.정부에서는 김문현의 보고에 의해 조병갑의 죄상을 알게 되자 그를 체포, 파면하고 새로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려 하나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사게 됩니다.
Q. 과거 얼음을 수출했던 시기가 있다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냉장고가 없던 시절 추운 지방의 얼음을 열대지방에 가져다 팔면 장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 미국의 프레데릭 튜더는 1806년 2월 10일 보스턴의 한 호수에서 얼음을 잘라 배에 싣고, 2400km떨어진 카리브해의 프랑스 식민지 마리니크로 실어나르는데 열대 기후에 익숙한 사람들이 얼음을 구경만 할뿐 아무도 그 용도를 몰랐고 얼음은 그냥 녹고 맙니다.그러나 그는 현지에 냉동창고를 만들고 주민에게 얼음 사용법을 가르쳤고, 제재소에서 나오는 톱밥이 얼음을 보관하는데 유용한 소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그는 고용인력을 늘리고 선박과 창고시설에 투자해 대량 수송체계를 갖추는데 수송하는 동안 얼음이 녹게됩니다.1815년 쿠바 하바나에 얼음창고를 만들고 얼음장사 10년째 되던 날 1816년 그는 쿠바에 얼음을 팔고 돌아오는 배에 열대과일을 남은 얼음으로 냉장보관해 뉴욕으로 이동, 냉장법을 개발하고 수송기간을 단축하면서 바나나와 오렌지 등이 온전히 도착할수 있게됩니다.그는 톱밥에 대패밥, 겨 등을 넣어 냉장법을 개선하고 말을 이용해 호수와 강의 얼음을 절단 하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