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674년 신라의 문무왕이 폐지한 외위제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외위제는 신라시대 지방민의 관등입니다.삼국시대 신라의 관등제는 경위와 외위 등 이원적으로 구성되었는데 경위는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한 관등이었고 지방민에게는 외위가 주어졌습니다.신라는 국가형성과정에서 복속해온 세력 가운데 지방에 거주하게된 세력들을 대상으로 왕경인과는 다른 외위를 만든 것으로 외위는 사로국이 주위의 소국을 병합해가는 과정에서 소국의 우두머리인 간이 거느리고 있던 일벌, 일척, 피일, 아척을 하위 관등으로 하고 간을 더욱 세분해 상위 관등으로 하여 일률적인 관등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외위는 11관등으로 상위관등부터 나열하면 악간, 술간, 고간, 귀간, 찬간, 상간, 간, 일벌, 일척, 피일, 아척 등이며 외위 11관등은 간 이상의 간위 관등과 일벌 이하의 비간위 관등으로 대별됩니다.외위제는 군현제를 통한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삼국통일과정에서 지방민의 지위가 향상됨과 동시에 경위 수여의 폭이 확대됨으로 존재의 의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674년 외위를 경위로 대치하는 규정을 정함으로 사실상 소멸되었습니다.
Q. 신임사화는 어떤 사건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임사화는 1721년부터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사류들의 참변으로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 입니다.숙종 말년 소론은 세자인 균(경종)을 지지했으며 노혼은 연잉군(영조)를 지지합니다.경종은 세자 때에 생모인 장희빈이 죽자 이상스러운 병의 징후가 나타났으므로 숙종은 이를 매우 걱정했습니다.한편 숙종은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 정권이 실권을 잡은 이듬해 이이명을 불러 소위 정유독대를 해 이로써 소론과 경종 보호의 명분을 더욱 확고히 하는 반면 노론은 연잉군 추대의 의리로 맞서 이후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경종은 성격이 온유했습니다.그러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정언 이정소의 상소를 시발로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도 연잉군의 책봉을 주장합니다.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년 8월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게되자 소론의 행사직 유봉휘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우의정 조태구도 그를 비호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또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달 뒤인 10월 집의 조성복의 상소로 세제청정을 요구, 이에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간의 논쟁이 치열했습니다.이와 같이 경종의 질환을 이유로 하여 경종 즉위년부터 세제 책봉과 세제 대리청정 문제를 서둘렀으므로 그것을 쟁점으로 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첨예화되며 이때 소론에 대한 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1721년 12월 소론의 과격파인 사직 김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인이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 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립니다.이 상소로 인해 병신 처분 이래 구축된 노론의 권력 기반은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원으로 교체되는 환국이 단행, 이에 노론 4대신은 차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이건명은 나로도로에 각각 안치되며 그 밖에 여러 노론들도 삭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습니다.한편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이 임명됨으로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히게 됩니다.그러나 소론 측에서도 김일경의 인물됨을 경계해 노론 숙청에 온건적 입장을 취하는 조태구, 최석항 일파는 완소, 강경론자인 김일경 일파를 준소라 했습니다.1722년 3월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격한 처단을 요구하고 있을 때 목호룡은 노론특에서 경종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소위 삼급수설, 즉 대급수, 소급수, 평지수를 들어 고변했습니다.이 음모에 관련자들은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자질과 그들의 추종자 들이었습니다.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했다는 것인데 이때 와서 드러난 것으로 목호룡이 남인 서얼로서 정치에 야심을 품고, 풍수술을 이용해 노론에 접근했으나 시세의 변화에 따라 고변함으로 노론에 타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이 고변에 의해 국청이 설치되고 역모에 관련된 자들이 잡혀서 처단되는 대옥사가 일어났고 이 옥사에서 노론 4대신은 연루되어 사사되었습니다.또 국청에서 처단된 자 중 정법으로 처리된 자가 20여인이고 장형으로 죽은 자가 30여 인이었으며 그 밖에 그들의 가족으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인 , 유배된 자가 114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가자 9명, 연좌된 자가 연인원 173명에 달했습니다.반면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와 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에 배향,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습니다.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자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일경과 목호룡은 처단되었고 임인옥안은 번안이 되었습니다.신임사화는 로론과 소론간에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대세워 대결한 옥사이나 결과적으로 당인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 것에 목적이 있었습니다.영조의 탕평책도 그 자신이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