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은서 전문가
성신학원
Q.  미국의 매카시즘이 어떤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50년 ~ 1954년 미국을 휩쓴 일련의 반공산주의 선풍으로 미국 위스콘신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R. 매카시의 이름에서 나온 말입니다.19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 '는 매카시의 폭탄적인 연설에서 발단한 것으로 1949년 이래 수년에 걸쳐 매카시가 상원의 비미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행한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의미하나 제 2차세계대전 후 냉전이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전통적인 미국자본의 시장이던 중국의 공산화와 잇달아 발생한 한국의 6.25전쟁 등 공산 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국민으로부터 그의 주장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습니다.매카시즘이 먼저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은 중국 정책에 영향력이 컸던 외교관, 국무성 및 중국통 정치학자 오언 래티모어, 국제법학자 제삽 등이 있었는데 대통령 H.S 트루먼도 공산주의자에게 약하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당시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필요 이상으로 경색된 반공노선을 걷게 되었습니다.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매카시즘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으나 매카시는 육군에 도전한 것이 치명상이 되어 1954년 상원의 사문결의에 의해 실각했습니다.
Q.  674년 신라의 문무왕이 폐지한 외위제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외위제는 신라시대 지방민의 관등입니다.삼국시대 신라의 관등제는 경위와 외위 등 이원적으로 구성되었는데 경위는 왕경인만을 대상으로 한 관등이었고 지방민에게는 외위가 주어졌습니다.신라는 국가형성과정에서 복속해온 세력 가운데 지방에 거주하게된 세력들을 대상으로 왕경인과는 다른 외위를 만든 것으로 외위는 사로국이 주위의 소국을 병합해가는 과정에서 소국의 우두머리인 간이 거느리고 있던 일벌, 일척, 피일, 아척을 하위 관등으로 하고 간을 더욱 세분해 상위 관등으로 하여 일률적인 관등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외위는 11관등으로 상위관등부터 나열하면 악간, 술간, 고간, 귀간, 찬간, 상간, 간, 일벌, 일척, 피일, 아척 등이며 외위 11관등은 간 이상의 간위 관등과 일벌 이하의 비간위 관등으로 대별됩니다.외위제는 군현제를 통한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삼국통일과정에서 지방민의 지위가 향상됨과 동시에 경위 수여의 폭이 확대됨으로 존재의 의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674년 외위를 경위로 대치하는 규정을 정함으로 사실상 소멸되었습니다.
Q.  신임사화는 어떤 사건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임사화는 1721년부터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사류들의 참변으로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 입니다.숙종 말년 소론은 세자인 균(경종)을 지지했으며 노혼은 연잉군(영조)를 지지합니다.경종은 세자 때에 생모인 장희빈이 죽자 이상스러운 병의 징후가 나타났으므로 숙종은 이를 매우 걱정했습니다.한편 숙종은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 정권이 실권을 잡은 이듬해 이이명을 불러 소위 정유독대를 해 이로써 소론과 경종 보호의 명분을 더욱 확고히 하는 반면 노론은 연잉군 추대의 의리로 맞서 이후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경종은 성격이 온유했습니다.그러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정언 이정소의 상소를 시발로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도 연잉군의 책봉을 주장합니다.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년 8월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게되자 소론의 행사직 유봉휘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우의정 조태구도 그를 비호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또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달 뒤인 10월 집의 조성복의 상소로 세제청정을 요구, 이에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간의 논쟁이 치열했습니다.이와 같이 경종의 질환을 이유로 하여 경종 즉위년부터 세제 책봉과 세제 대리청정 문제를 서둘렀으므로 그것을 쟁점으로 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첨예화되며 이때 소론에 대한 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1721년 12월 소론의 과격파인 사직 김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인이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 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립니다.이 상소로 인해 병신 처분 이래 구축된 노론의 권력 기반은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원으로 교체되는 환국이 단행, 이에 노론 4대신은 차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이건명은 나로도로에 각각 안치되며 그 밖에 여러 노론들도 삭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습니다.한편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이 임명됨으로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히게 됩니다.그러나 소론 측에서도 김일경의 인물됨을 경계해 노론 숙청에 온건적 입장을 취하는 조태구, 최석항 일파는 완소, 강경론자인 김일경 일파를 준소라 했습니다.1722년 3월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격한 처단을 요구하고 있을 때 목호룡은 노론특에서 경종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소위 삼급수설, 즉 대급수, 소급수, 평지수를 들어 고변했습니다.이 음모에 관련자들은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자질과 그들의 추종자 들이었습니다.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했다는 것인데 이때 와서 드러난 것으로 목호룡이 남인 서얼로서 정치에 야심을 품고, 풍수술을 이용해 노론에 접근했으나 시세의 변화에 따라 고변함으로 노론에 타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이 고변에 의해 국청이 설치되고 역모에 관련된 자들이 잡혀서 처단되는 대옥사가 일어났고 이 옥사에서 노론 4대신은 연루되어 사사되었습니다.또 국청에서 처단된 자 중 정법으로 처리된 자가 20여인이고 장형으로 죽은 자가 30여 인이었으며 그 밖에 그들의 가족으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인 , 유배된 자가 114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가자 9명, 연좌된 자가 연인원 173명에 달했습니다.반면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와 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에 배향,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습니다.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자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일경과 목호룡은 처단되었고 임인옥안은 번안이 되었습니다.신임사화는 로론과 소론간에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대세워 대결한 옥사이나 결과적으로 당인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 것에 목적이 있었습니다.영조의 탕평책도 그 자신이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졌습니다.
Q.  서희의 담판이란 정확히 어떤 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의 제 1차 침입 때 고려의 장수 서희가 거란장수 소손녕과 벌인 담판 입니다.993년 거란이 소손녕을 장수로 삼아 고려에 침입했을 때 고려 조정에서는 중신을 시켜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 이북의 땅을 베어주고 절령을 경계로 삼자는 견해 등이 있었는데 이에 성종도 할지론을 따르려 하나 적장의 석연치 않은 행동을 간파한 서희는 저들의 출병이 영토의 확장에 있지 않음을 아뢰고 왕의 동의를 받아 직접 적진에 나아가 소손녕과 담판하게 됩니다.이 담판에서 소손녕은 침입의 이유로 '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자기 나라와 땅을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는 점을 들고 따라서 '만약 땅을 베어 바치고 조빙을 닦으면 무사할 것'이라 제안합니다.이에 대해 서의는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옛 터전으로 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한 것이다. 만일 지계로 논한다면 상국의 동경도 우리 경역 안에 있는 셈인데 어찌 침식했다고 할수있겠는가 .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였는데 여진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어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 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아 성보를 쌓고 길이 통하게 된다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답했습니다.서희의 당당하고 조리있는 변론을 들은 소손녕은 군사를 돌리고 약속대로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개척하는데 동의해 강동 6주를 개척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Q.  세계최대 목탑 황룡사9층목탑은 실제로 있었나요? 어째서 현재 남아있지 않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던 신라의 목탑으로 선덕여왕때 자장 대사의 건의로 세워졌다고 하며 몽골의 침입 때 불타 사라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습니다.탑은 80미터에 달하는 매우 거대한 규모였는데 모구 9개의 층으로 이루어졌고, 9개의 층은 신라 주변의 아홉 나라를 상징했습니다.이는 신라가 동북아시아에서 중심 나라로 발돋움하게 하려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여러 차례 손질하여 고쳐가며 보전되었으나 고려 고종때인 1238년 몽골이 침입하여 황룡사가 불타 사라질때 함께 없어졌습니다.
5657585960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