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세계적인 대제국을 세운 원나라가 97년밖에 존속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종이 2개월만에 붕어하면서 고려의 대청도로 유배를 가 있던 명종의 장남 토곤테무르가 1333년 원나라 제 11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혜종으로 즉위, 혜종이 즉위하면서 황제가 연달아 교체되는 혼란기는 종식되었으나 이미 원나라는 권신들의 권력다툼, 홍건적과 같은 한족들의 반란, 흑사병의 창궐 등으로 쇠퇴하고 있었습니다.1351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홍건적 중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1358년 명나라의 건국을 선언,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 직후 대규모 북벌을 단행해 원의 수도 대도를 함락, 혜종은 북쪽의 몽골 고원으로 달아나며 북원이 성립됩니다.북원은 중원을 되찾기 위해 명군과 전쟁을 벌이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북원의 제 3대 황제인 천원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조리그투 칸이 원나라의 황제직을 버리고 몽골 대칸의 지위만 잇기로 하면서 1388년 원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Q. 황희 선생은 엄청난 시간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어떤 점이 뛰어난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에서 가장 영의정을 오래 역임한 사람으로 영의정 18년, 좌의정 5년 , 우의정 1년 합쳐 총 24년을 정승에 자리에 있었습니다.대국을 보는 시각이 뛰어났고 당대 알아주는 군자로 범죄 사건에도 너그러움을 위주로 처리했으며 강직, 분명, 정확한 스타일의 인물로 주로 추진력과 결단력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습니다.
Q. 프랑스의 군인인 장바티스트 베시에르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베시에르는 1768년 8월 6일 프랑스 남동부의 소도시 프레사크에서 외과의사 마튀랭 베시에르와 앙투아네트 르모지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15세에 카오르의ㅏ 왕립 콜레주에서 공부를 시작한 그는 가업을 잇기 위해 몽펠리에의 의과대학에 진학하나 집안의 경제사정이 악화되어 학업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의원에서 조수로 일했습니다.1792년 2월 그는 혁명정부의 주도로 조직된 새 왕실근위대의 근위병으로 선발되어 파리에 상경, 근위대가 4개월만에 해체되어 파리의 국민위병 소속으로 편입, 8월 10일 사건 때 튈르리 궁을 탈출하는 귀족들을 돕다 반혁명파로 몰려 잠시 숨어지냈습니다.11월 1일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피레네부대에 자원입대하고 이후 동피레네군에 배속, 그가 소속된 제 22엽기병연대는 불루전투와 시에라네그라 전투, 피게레스 전투에서 많은 공훈을 세웠고 에스파냐와 전쟁이 마무리된 후 22엽기병연대는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재배치됩니다. 1796년 5월 30일 보르게토 전투에서 그의 활약을 눈여겨 본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 나폴레옹은 그를 사령관 경호대의 지휘관으로 임명, 이 경호대는 훗날 제국근위대 엽기병대의 모체가 됩니다.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경호대장으로 동행, 아부키르 전투에서 기병대장 조아킴 뮈라와 함께 용맹함을 보여주며 1799년 8월 17일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몰래 빠져나갈 때 몇몇 측근들과 함께 나폴레옹을 수행,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때에도 동행, 통령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베시에르를 새로 창설된 통령근위대의 부대장으로 임명합니다.1800년 6월 14일 베시에르는 마고랭 전투에서 프랑수아 에티엔 켈레르만 장군을 지원하여 결정적인 순간의 기병 돌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그는 이 공적으로 준장으로 진급합니다.1804년 5월 19일 나폴레옹은 베시에르를 원수로 임명, 제국근위대의 기병총감 직을 맡기며 1805년 2월 2일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그랑에글을 수여, 스는 소장으로 진급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았고 그때까지 사단급 이상의 부대를 지휘한 적이 없어 그의 원수 임명에 불만을 품은 장군들도 있었으나 1805년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그는 제국근위대의 행정과 운용 전체를 담당,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9000기의 근위기병대를 이끌고 러시아 근위대를 향해 돌격함으로 그의 통솔력을 보여줬습니다.1808년 그는 에스파냐 방면군 제 2군단의 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에스파냐 북부 지역을 장악하라 명받고 7월 14일 메디나데리오세코 전투에서 앙투안 드 라살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대를 활용해 숫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 이로써 에스파냐 북부 지역이 일시적으로 프랑스군의 통제하에 들어왔으며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르파트가 마드리드에 입성해 에스파냐의 왕좌에 앉을수있었습니다.1809년 2차 오스트리아전쟁에서 뮈라를 대신해 예비기병대장을 맡아 아스페른- 에슬링 전투에서 기병대를 지휘, 이 전투 직후 나폴레옹으로부터 이스트라 공작 작위를 받았으나 7월 5일 ~ 7월 8일 바그람 전투에서 적을 향해 돌격하려는 순간 날아온 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어 더이상 지휘를 할수 없게됩니다. 부상 치료를 위해 먼저 프랑스로 귀국한 그는 곧 영국의 왈헤렌 원정대 저지를 목적으로 벨기에 플랑드르로 파견되었습니다.1810년 그는 에스파냐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에스파냐로 파견, 그러나 그는 포르투갈 방면군 사령관 앙드레 마세나 원수와 계속 갈등을 빚었고 1811년 5월 3일 푸엔테스데오뇨로 전투에서는 그와 제대로 협력하지 못해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는 영국군에 패하게 됩니다.1812년 그는 러시아 원정에서 제국근위대를 지휘하지만 근위기병대는 말과 식량부족으로 기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들은 고로디노 전투에서 황제를 지켰고 베레지나 강으로 퇴각하는 아군을 엄호했지만 러시아 원정에 투입된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습니다.1813년 그는 근위기병대를 포함한 전 기병대를 통솔하는 중요한 직위를 맡으나 뤼첸 전투가 일어나기 하루 전인 1813년 5월 1일 리파르 인근에서 정찰을 나갔던 그는 프로이센군 포병대가 날린 유탄에 맞아 흉부가 짓뭉개진채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