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인도에서 일어난 세포이 항쟁의 발생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국은 세포이에게 신형 총을 공급했는데, 이 총은 총알을 빠르게 장전할 수 있도록 개별 포장된 탄약통을 사용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총에 탄약통을 장전하려면 탄약통을 입으로 뜯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탄약통에는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돼지와 소의 기름이 묻어 있었다.인도인은 대부분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믿는데,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이슬람교와 소고기를 금기시하는 힌두교를 모두 무시하는 처사라며 두 종교의 세포이들이 일어선 것이다. 심지어 소·돼지 기름이 칠해진 것을 놓고, 영국이 인도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음모설까지 떠돌았다.세포이 항쟁은 결국 군대 안의 반란이 인도 전역의 독립투쟁으로 확대돼 일어난 것이다. 영국의 인도 지배 이후 100년 만에 행해진 인도 독립운동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Q. 미국 대통령 먼로가 한 먼로선언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먼로 대통령은 미국이 아직 신생국이긴 하나 유럽 대륙의 전쟁과 내부 문제에 말려들지 않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유럽에 대해서도 신세계의 문제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로주의에 따르면 신세계와 구세계는 완전히 분리 독립된 체제로 되어 있으므로 그 영향권 역시 분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신세계는 다시는 식민화되지 않을 것이며, 유럽 강국이 이 지역을 억압하거나 지배하려 든다면 이는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이었다. 이 선언은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서 분리시키는 효과를 불러왔다.먼로 선언은 아메리카 대륙이 더 이상 유럽의 식민 지배를 용납하지 않으며, 유럽 강대국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책동은 미국에게 있어서 "평화와 안전에 위험한" 행동임을 알리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기본적으로 먼로 선언은 유럽 국가들에게 "아메리카인을 위해 아메리카를 떠나라"는 경고였다. 먼로주의는 19세기 초반 대륙팽창의 시대를 상징한다. 먼로주의는 건국의 국부들의 고립주의적 전통을 따르는 방어적 수동적 선언이 아니라 대륙 팽창을 염두에 둔 적극적, 공격적 선언 이었다.
Q. 우리나라 트로트는 언제부터 시작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트로트는 1920년대 「시드른 방초」 등 일본 엥카의 번역·번안곡이 인기를 모은 이후, 1928년 문수일 작사, 김서정 작곡의 「세 동무」에 이르러 창작곡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1932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일명 「황성 옛 터」)을 거쳐, 1934년 고복수가 부른 「타향」(일명 「타향살이」)과 1935년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에 이르러 그 형태가 확고히 정착되었다. 한국가요와 일본가요의 본질적 차이는 양식화된 것과 덜 양식화된 것의 차이로 본다. 이는 일본가요가 세련되었으나 억압적인 반면, 한국가요는 거칠지만 자유롭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즉 엔카는 유동의 폭이 좁고 양식화되어 있는 반면 트로트는 음고 유동의 폭이 넓고 임의적이다.
Q. 아프리카의 경제성장이 다른 대륙에 비하여 유의미하게 낮은데 그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 이유는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과거 많은 아프리카 국가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침탈당했고, 온갖 핍박 끝에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꿈에 그리던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독립은 아프리카에 정치적 자유와 경제 발전 가능성을 열어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아프리카는 이때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서구 열강의 식민통치에서 어렵사리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제국주의 사상으로 오해하고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결국 아프리카는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을 엉뚱하게 자본주의, 자유기업, 외국의 투자 배척으로 드러냈고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하는 악수를 두었습니다. 그 결과 독립 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는 대다수가 독립하기 전보다 훨씬 심각한 빈곤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해외 구호에 목숨을 의탁하는 사이,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한 권력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축적하며 ‘국민 모두가 아니라 그들만 잘사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Q. 고려 무신정권기 권력자 중 한 명인 경대승은 요절했다고 들었습니다 사망 원인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경대승은 집권 4년차인 1183년 7월, 30세의 이른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는 비운을 맞는다. 사망 원인에 대해선 주로 정신적 문제가 병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설이 많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이의민 세력이나 혹은 부하에 의해 암살당한 것 아니냐는 설도 제기하지만 일단 고려사에는 정중부의 꿈을 꾸고 병을 얻어 이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경대승의 요절은 그가 바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많은 정적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원인으로 추측된다. 경대승은 무인임에도 경인년 이전으로 되돌리기를 원했고, 다시 조정을 문신들 위주로 바꾸기 위해 무신들을 숙청하거나 무신들의 권력 기관인 중방의 권한을 줄이면서까지 문신 우대 정책을 펼쳤지만 무신들에게 옹립된 명종의 눈에는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Q.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에 있었던 적도 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309년 ~ 1378년,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전했던 시기를 아비뇽 유수라 하는데 '유수(幽囚)'는 '잡아 가둠'이라는 의미로, 교황이 사실상 한지에 유폐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바빌로니아에 의해 유대 왕국이 사라지고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다.1376년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가서 2년 후인 1378년에 사망하고 새 교황이 로마에서 선출되면서 막을 내렸지만, 프랑스 왕국이 이에 불복하여 아비뇽에 또다른 교황을 선출하면서 1418년까지 40년간 서방교회 대분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교황청의 입지는 추락했고, 교황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위클리프파, 후스파, 공의회수위설 등이 득세했다. 교황은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세속군주화되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아비뇽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교황령으로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