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태종 이방원이 가족 피신 시켰다는 기록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태조실록》에는 고려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을 당시 개경과 인근에 머물고 있던 이성계 가족들의 다급한 상황이 실려 있다. 〈애초에 신의왕후(神懿王后-한씨)는 (경기도)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의 전장(田莊)에 있고, 강비(康妃)는 포천의 철현(鐵峴)의 전장에 있었는데, 전하(殿下-태종 이방원)가 전리정랑(典理正郞-이조정랑)이 되어 서울(-개경)에 있으면서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사제(私第)에 들어가지 않고서 곧 말을 달려 포천에 이르니 일을 주간하는 노복(奴僕)들은 이미 다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전하가 왕후(王后)와 강비(康妃)를 모시고 동북면(-함경도)을 향하여 가면서 말을 탈 때든지 말에서 내릴 때든지 전하께서 모두 친히 부축해 주고 스스로 허리춤에 불에 익힌 음식을 싸가지고 봉양했다. 경신공주(慶愼公主), 경선공주(慶善公主), 무안군(撫安君-이방번), 소도군(昭悼君-이방석)이 모두 나이가 어렸으나 또한 따라왔으므로 전하께서 자기가 안아서 말에 태우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전하가 또한 말을 이끌기도 했다.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양식이 모자라서 길가의 민가(民家)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철원관(鐵原關)을 지나다가 관리들이 잡고자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밤을 이용하여 몰래 가면서 감히 남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판에 유숙했다. (강원도)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의 집에 이르러서 가까운 마을의 장정(壯丁) 100여 명을 모아 항오(行伍)를 나누어 변고를 대비(待備)하면서 말했다. “최영은 일에 밝지 못한 사람이니 반드시 능히 나를 뒤쫓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오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7일 동안을 머물다가 일이 안정된 것을 듣고 돌아왔다. 처음에 최영이 영을 내려 정벌에 나간 여러 장수의 처자(妻子)를 가두고자 했으나 조금 후에 일이 급박하여 과연 시행하지 못했다.〉
Q. 조선의 효종은 왜 북벌정책을 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자호란이 치욕적인 성 아레의 맹세로 끝나고,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러한 민족적 굴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게 되었다.효종은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여 비밀리에 군대를 훈련시키고 성지(城池)를 개수했다. 또한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등에게 신무기를 만들게 하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하여 군비를 확충하였다. 북벌의 첫 시험장은 나선(러시아)정벌이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Q. 그리스철학자들은 현재까지 유명합니다 왜 그런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리스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 철학은 서양 정신세계의 시조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이전에도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수많은 문명들이 번성했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세계를 이성으로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한 문명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과학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이 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했고, 이러한 합리주의적 사조가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서양의 근본인 로마 제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서양 세계의 정신적 틀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것입니다.그리고 동양의 철학자는 공자, 맹자, 노자,장자,관중,한비자,주자,원효,이규보,김시습,이황,정약용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