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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Q.  중국의 국공내저네어 공산당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국민당의 장교를 포함한 중화민국군의 수뇌부들은 중국 인민들에게 금품을 약탈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며 인민들의 민심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중국 국민당 내부에서도 이러한 부정부패를 알고 있었지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면 장제스를 포함한 중화민국 수뇌부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결국 중국 공산당은 중국 국민당이 인민들로부터 민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에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중국 동북지역을 기준으로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앞세워 민심을 얻으며 세력을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회화전역 전투에서 승리하여 중국 하남성, 하북성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중국 공산당 홍군이 가는 곳 마다 중국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진군 또 진군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중국 공산당은 중화민국의 중심지인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붉은 깃발을 올렸습니다. 난징과 상하이가 함락 당하자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인근 타이완 섬으로 도망갔고 타이완 섬에 중화민국을 정비하기에 이릅니다.이후 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현재의 중국)이 새롭게 건국되고 중화민국의 잔당들이 대륙에서 대부분 정리된 이후 중국은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최후의 거점인 타이완 섬 공격을 몇 차례 검토하지만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을 지원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Q.  고려는 외왕내제를 보였다고하는데 조선은 그렇지않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임금은 황제, 천자와 함께 (대)왕이라는 위호를 상황에 따라 강대세력들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는 대부분의 시기에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았다. 태조대와 광종대 등에 잠시 연호를 정하여 사용한 적도 있지만, 대륙왕조와 사대외교가 없었던 때의 일이다.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외왕내제를 완전히 행하지는 않았으나, 황제가 쓰는 묘호를 사용하는 등 황제국의 예법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시절에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면서 칭제건원을 함에 따라 공식적인 황제국이 되었다.
Q.  조선은 일본과 어떤식으로 외교를 했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전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딱히 규칙을 정해놓지 않고 몇 번 오갔고 오닌의 난 이후로 일본 전역이 전란에 빠지며 중앙 정부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우치 등 지방 다이묘가 따로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교류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해 전국 시대를 끝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직후에는 당연히 일본과 외교가 단절됐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절단이 일본 각지로 70번 가량 방문했다.그러다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밖에 안 된 1607년, 그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정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과는 상관없다는 언급을 하며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한 끝에 조선 조정이 이를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한다. 이후 포로 교환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3회에 걸쳐 사명당을 비롯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사절을 파견한다. 조선에선 원수였던 일본과 화해하는 게 달갑지는 않더라도 일본과 계속 사이 나쁘게 지내면 언젠가 다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또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 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을 멸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도쿠가와 입장에선 새로 집권하긴 했지만 1615년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는 도요토미 파벌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한 상태라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던 데다가 그는 조선을 공격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조선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이득이었다.그 후 에도 막부 시기인 1811년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답겸쇄환사가 3번,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쇼군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거나 태평성대가 오래 유지되는 것을 축하한다는 등 갖가지 명목으로 파견되었지만 회답겸쇄환사까지 포함하여 6회째인 1655년부터 새로운 쇼군의 취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보내졌는데, 쇼군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으므로 비정기적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해 육로로 동래까지 간 다음 배를 타고 오사카, 강을 거슬러 교토까지 가서 에도까지 이동했다.
Q.  조선시대 왕들은 화장실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과 왕비는 외진 곳에 설치된 측간을 이용하지 않고 ‘매화(梅花)틀' 또는 ‘매우(梅雨)틀'이라고 하는 이동식 변기를 이용하였다. 임금의 얼굴을 ‘용안', 몸을 ‘옥체', 식사를 ‘수라'라고 높여 부르듯이 임금의 대변과 소변을 ‘매화열매(梅)'와 ‘비(雨)'라고 높여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매우틀은' 높이 30cm 정도의 나무상자에 빨간 우단으로 감싼 것으로, 변을 담을 수 있는 구리 그릇을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도록 한글자음 ‘ㄷ 자' 형태로 제작되었다. 임금이 속이 불편하다는 신호를 보내면 급히 복이나인과 궁녀들이 사방으로 휘장으로 감싸고 가운데 매우틀을 대령한다. 임금이 매우틀 위에 걸터앉아 용변을 본 뒤에는 복이나인이 비단으로 뒤를 닦아주고 매우틀은 왕실 전용 병원인 전의감에 보내어 변의 모양, 색깔, 냄새 등으로 임금의 건강을 살피는 것이다.
Q.  피라미드가 건설되었을 때 메머드가 있었다고 하는데 맞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집트 고대왕조가 피라미드를 한창 건설하던 약 4000년 전, 북극해에 있는 러시아 브란겔 섬(랭글섬)에서는 선사시대 대형 포유류인 털매머드가 살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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