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에서는 대명률을 적용해 조선식으로 형을 집행했는데 한반도의 거리가 좁은데 유배보낼때 어떻게 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의 대명률(大明律)에 따른 유배형의 거리 규정이 조선의 지리적 조건과 맞지 않아 시행 초 혼선을 일으켰기 때문에 1430년(세종 12) 조선의 실정에 따라 각각 600리, 750리, 900리 등으로 유배 거리가 조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000리 형이 원칙대로 적용되어 전국을 순회하거나, 여러 고을을 옮겨 총 거리를 합산해 채우기도 하였다. 예컨대 1776년(정조 1) 정조는 불경한 상소로 그의 심기를 건드린 김약행에게 사형을 감해서 유(流) 3,000리를 언도해 기장현으로 보냈다. 3,000리를 채우라는 정조의 특명에 의금부는 서울→기장현(970리)→강원도 평해(400리)→함경도 안변(940)→단천부(690리) 등으로 3,000리가 정확히 반영된 코스를 정한 사례도 있다.
Q. 신라는 어떻게 삼성이 돌아가면서 왕이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에서 최초로 성씨를 칭한 인물은 진흥왕(재위 540∼576)이고 이전까지는 성(姓)에 대한 관념이 없었는데, 진흥왕이 처음으로 '김진흥'(金眞興)이라는 이름을 대외 관계에 사용했습니다.신라에는 초창기 혁거세, 알지, 탈해를 시조로 숭앙하는 귀족 혈족집단이 있었고 진흥왕이 김씨를 칭하면서 혁거세를 추종하는 집단은 박씨, 탈해를 섬기는 집단은 석씨를 성으로 채택한 것입니다.김씨는 세 성씨 가운데 가장 강한 권력을 갖게 됐고, 혈족집단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왕권이 강화하면서 임금은 혈족집단에 의존할 이유가 사라졌고 그 결과 왕이 특정인에게 성을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가야계인 김유신이 김씨 성을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Q. 절이나 또는 궁궐에 단청에 그린 문양에는 어떤 의미가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단청은 오방색의 미묘한 조화로 연화, 국화, 모란 등의 자연무늬와 십장생과 십이지신상, 용봉, 천마 등의 동물무늬, 복을 기원하는 길상무늬가 어우러져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선과 악, 평화와 해방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