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러시아 출신도 아닌 스탈린은 어떻게 소련연방의 국가원수가 될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20년대 초 모스크바에서는 정권 수뇌들 사이에 노선 차이에 따른 갈등이 심해지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내세우며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돕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본 반면,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장하며 소련의 입지를 든든히 하는 일이 먼저라고 했다.또한 자본주의적 방식을 일부 채택했던 ‘신경제정책’ 역시 쟁점이었다. 트로츠키는 이를 사회주의의 타락으로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본 한편, 레닌과 스탈린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당분간 불가피하다고 여겼다.트로츠키파와의 갈등이 점점 험악해지자, 레닌은 스탈린을 당의 초대 서기장에 앉히고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직후(1922년 5월) 뇌졸중 발작을 일으킨 레닌은 고리키 마을에 칩거하며 정무를 스탈린에게 대리하도록 했는데, 가끔 찾아온 스탈린과 대화하며 점점 그의 냉혹함과 비인도성에 회의가 들었다고 한다.그리하여 1922년 12월 말에 작성한 유서에서 자신이 죽은 후에는 집단지도체제를 택해야 하며, 스탈린은 지나치게 무자비하므로 권력을 독점하게 할 수 없고 지금의 서기장직에서도 해임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유서를 은폐하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끌어들여 ‘삼두정치’ 체제를 수립했다.그리고 1924년 1월에 레닌이 죽자, 트로츠키파를 숙청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스탈린 한 사람의 손에 갈수록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이번에는 트로츠키에게 접근하여 반 스탈린 전선을 펼쳤지만, 러시아 혁명 10주년이 되던 1927년의 당 중앙위원회에서 스탈린은 세 사람을 제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스탈린의 독재체제는 완성된 것이다.
Q. 독일 나치가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2차세계대전을 앞두고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나치 독일과 이오시프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의 소비에트연방(소련)은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독ㆍ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을 침공, 조약의 파기와 함께 '독ㆍ소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로 인해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 등 추축국(樞軸國) 동맹군에 대항하는 미국ㆍ영국ㆍ프랑스의 연합군이 소련을 지원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의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하류에 위치한 도시로,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 사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스탈린이 집권한 뒤 1925년 '차리친(Tsaritsyn)'에서 '스탈린그라드(Stalingrad)'로 개명되었다. 특히 캅카스 지역의 유전지대를 연결하는 주요 석유 공급로라는 이점 때문에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했던 히틀러는 스탈린의 이름이 붙여진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함으로써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고자 했다.1942년 7월 17일부터 시작된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독일군의 제6군 사령관이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Friedrich Wilhelm Ernst Paulus, 1890~1957)는 33만 병력을 투입, 600대의 폭격기로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여 민간인 사망자만 4만여 명이 희생됐다. 그러나 초반 유리했던 전세와 달리 독일군의 전차부대는 소련군의 기관총부대에 비해 시가전에서 취약하였고, 전투가 장기전에 돌입하자 소련의 혹한의 날씨를 견뎌야 했고 군복과 식량 등도 점차 고갈되었다. 그해 11월부터 소련군의 반격이 이어졌고, 결국 독일군의 무기 보급로까지 차단되면서 22개 사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당했다. 후방 부대의 지원 병력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독일 제6군은 2개월간의 치열한 저항 끝에, 1943년 2월 2일부로 소련군의 공세에 항복하였다. 히틀러는 포로가 되기 전에 자결할 것을 종용하는 의미로 사령관 파울루스를 원수로 승격시켰으나, 결국 파울루스가 항복하면서 스탈린그라드전투는 소련군의 승전으로 마무리되었다.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독일군은 22만여 명의 전사자와 9만 1000여 명의 포로가 발생했고, 추축국 동맹군(이탈리아군ㆍ루마니아군ㆍ헝가리군)도 30만 명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이때의 독일군 포로 중 생존자 6000명만이 1955년 독일로 송환될 수 있었다. 또한 소련군은 47만 8000여 명이 전사하고 65만여 명의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총 110만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로써 전쟁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와 포로, 민간인 피해를 유발한 전투로 악명이 높다.한편 스탈린그라드전투로 심각한 전력 손실을 입은 독일군은 이후 1945년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하게 되었다.
Q.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54년 이집트의 태수가 된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Muhammad Said Pasha)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에게 운하 개착 특허권과 수에즈 지협 조차권(租借權)을 주었고, 1856년에는 이집트의 종주국(宗主國)이던 오스만투르크제국도 이를 승인하였다. 레셉스는 1858년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Universal Company of the Maritime Suez Canal)’를 이집트 법인(法人)으로서 설립하였으며, 2억 프랑(800만 파운드)의 자본금에 주식(株式)을 국제적으로 공개하였다. 주식은 1주 500프랑이었으며, 프랑스인이 20만 7000주를 소화하고, 이집트 태수가 17만 7000주를 인수하였으며, 운하 개통 후 99년간 소유권을 법인이 보유했다가 그 후 이집트 정부에 소유권을 이양하는 데에 합의하였다.이리하여 레셉스는 1859년 4월 25일 지중해안의 포트사이드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대의 운하를 개수(改修)하여 음료수의 공급과 수송로가 확보된 단계에서 영국이 수만 명의 이집트인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는 점과 6만 ha에 이르는 농경지 조차를 이유로 들어 이집트 정부에 항의했기 때문에 운하의 개착 공사가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다. 영국의 계속되는 방해로 공사가 늦어지고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불어나자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는 영국 및 오스만투르크제국과 대립하기에 이르렀다.이러한 사태는 1864년 나폴레옹 3세의 중재로 해결되었으며, 1866년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는 이집트의 회사이며, 이집트의 법과 관습에 따른다’는 내용이 포함된 새로운 협정이 조인되었고, 같은 해에 오스만투르크제국 황제의 최종공사허가서가 나왔다. 이리하여 운하는 개통되었고, 1869년 11월 17일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귀빈·명사가 초대된 성대한 개통식을 가졌다.
Q. 일제시대 광복군이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것을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광복군이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연합국과 나란히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는 공식 기록이 확인됐다.국가보훈처는 영국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관련 자료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발굴했다고 12일 밝혔다.인면(印緬)은 인도와 미얀마를 뜻한다. 이 공작대는 한국광복군 소속 부대로 1943년 8월∼1945년 7월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과 공동 작전을 펼쳐 직접 대일항전을 펼친 유일한 부대다.영국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한 인면전구공작대 자료는 보고서 등 8종 총 400여 쪽 분량으로 공작대의 선전 활동, 공작대 부(副)대장 문응국 지사의 활약, 영국 측의 평가 등을 담았다.인면전구공작대는 영국특수작전집행부(SOE) 산하의 인도전구선전대(IFBU)에 소속돼 활동한 것으로 기록됐다.영국군 보고서는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 부대와 SOE에 의해 발견된 버마어와 인도어를 할 수 있는 14명이 배치됐다", "제17사단장은 이 부대에 배치된 한국인 장교인 문응국이 했던 가치 있는 작전수행을 칭송했다"는 기록을 남겼다.이는 일본군이 점령한 미얀마 접경지역인 임팔에서 전개된 영국군의 작전인 임팔전투에서 문응국 지사가 보인 활약상을 영국 측이 인정한 것이라고 보훈처는 설명했다.또 "IFBU의 방송 프로그램은 부대 사령관과 협의로 훈련된 한국인 선전 요원에 의해 마련되고, 지금 일본에서는 금지된 감성적인 종류의 일본 레코드들을 내보낸다"며 공작대원들의 대일 선전 활동을 설명했다.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김희곤 관장은 "영국군의 공식기록으로 인면전구공작대의 활약상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국·영국의 공동항전과 연합작전 사실이 증명됐다"고 말했다.보훈처는 수집한 자료 전체에 대한 번역과 분석 작업에 들어가는 한편 한·영 수교 140주년이 되는 내년에 자료집 편찬과 한·영 국제학술회의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박민식 보훈처장은 "독립운동이 독립 쟁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반제국주의를 향한 연대와 공동 투쟁의 역사로 이어졌음을 확인해주는 증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