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가 흔히 무대포 란 말을 자주 쓰는데 대포가 즉조총이 없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대포의 뜻은 멀리 조총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일본은 막부들의 전쟁이 100년도 넘게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를 '전국시대'라고 합니다. 무대포의 어원인 "무철포"는 이 시기에 큰 획을 긋는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때의 '나가시노 전투'로 인해 무대포 뜻은 앞뒤 생각도 못한다는 것이 되었습니다.나가시노 전투는 1579년에 벌어졌으며, 최고의 기마병을 가진 '다케다 가쓰요리'군과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벌인 전쟁입니다. '나가시노' 성을 빼앗기 위한 전쟁 중 '시타라가하라' 전투에서, 연합군은 당시로서는 최대의 철포 부대를 동원하였습니다.하지만 최강의 기마대를 가진 다케다는 무리하게 공격을 하였고, 오다와 도쿠가와 군은 지능적으로 철포를 이용하여 완전히 격파하여 버렸습니다. 물론 당시의 철포는 지금 같은 적중률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지만, 최고의 기마병을 보병으로 격파하는 전술이 나오면서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이 시타라가하라 전투에서 "철포도 없이 무작정 싸운 것"을 보고 사람들이 무철포, 즉 무뎃뽀라고 하면서 지금의 무대포 뜻이 되었습니다. 무대포 근성, 무대포 정신은 그저 죽음을 뻔히 보면서도 발악을 했던 역사였을 뿐입니다.이후 전국시대는 여러 곡절을 거쳐서 오다 노부나가의 졸병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전범인 것입니다. 또한 조선을 침략할 때 조총은 실제 성능보다 더 공포를 주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능이 아니라 신무기라는 선입견 때문이지만 말입니다.
Q. 부르봉 왕조시절 마리앙투아네트를 프랑스 국인은 왜 그냥 처음부터 시기하고 싫어한건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첫 번째로 그녀는 프랑스와 사이가 나빴던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의 첩자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베르사유 궁전,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은 모조리 뒤집어 엎어졌고, 그 중에는 당연히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나 오빠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그리고 자매들 및 친족들과 교환한 편지도 있었다. 정치외교학과와 사학과에서 동맹의 역전이라 불릴 정도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외교 관계가 급반전+급진전된 18세기 중후반의 국제 정세를 감안하면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2번째로 왕비를 그저 애 낳는 기계 정도로만 취급하여 뒷방에 처박아놓고는 공식적으로 정부를 임명하여 궁정의 꽃으로 삼았던 루이 14세, 루이 15세와는 달리 루이 16세는 앙리 4세 이래 전통적으로 호색한이었던 부르봉 왕가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여색을 별로 밝히지 않고 마리 앙투아네트 이외의 여자에게 시선을 기울이지 않았다. 현대 기준으로는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던 국왕' 정도의 취급이었겠지만, 당대의 기준에서 이런 행동은 어이없게도 루이 16세에게 "성적으로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반대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기를 죽이는 몹쓸 여자"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3번째로 당시까지 프랑스 여론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왕의 정부를 씹어대는 것이 취미였고, 스트레스 풀이용 범 국민 스포츠였다. 그런데 루이 16세에게는 정부가 없었으므로 이런 이유로는 비난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자 프랑스 국민들은 없는 정부 대신 왕비를 씹어댔다.4번째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전까지의 프랑스 왕비들과 비교하면 매우 활동적이었고, 궁정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프랑스 왕비상"에 어긋나는 모습이 되어 궁정의 보수파들에게 눈총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근엄한 고위 귀족들을 고리타분한 인물들이라고 여겨 가까이 하지 않은 대신, 자신의 나이 또래의 인물들과 주로 어울렸기 때문에 베르사유의 고위 귀족들에게도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5번째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밀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은 랑발 대공비와 욜랑드 드 폴리냐크 백작부인이 있었는데, 이 중 랑발 대공비는 정숙한 귀부인이었으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이 독으로 작용하여 베르사유 습격 당시 납치되어 사지가 찢어지는 잔혹한 처분을 당하고 그 머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 창문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왕비의 총애를 받은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원래 작위밖에 없는 가난한 여성이었으나, 비슷한 나이의 왕비와 곧 친구 사이가 되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고위 귀족이 맡는 것이 관례였던 왕손의 가정교사 자리에 '겨우' 백작부인을 임명하는 파격적인 처분을 내린 것은, 귀족들에게 또 한 번 큰 반감을 사는 요인이 되었다.6번째로, 위에서 언급한 폴리냐크 백작부인에게 푹 빠져서 처음에는 연간 50만 프랑의 연금을 지급하더니 나중에는 연금액이 100만 프랑까지 올라갔다. 사욕이 없었던 랑발 대공비에 비해서 폴리냐크 백작부인은 매우 약삭빠른 여자여서 연금과 대저택, 각종 선물 따위를 가능한 한 우려내려 들었기 때문. 먼저의 조치로 고위 귀족들에게 반감을 산 데 이어 이러한 처분은 대중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Q. 유대교 사람들의 복장은 왜 통일된 건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말씀하신 모습의 사람들은 하레디라는 극정통파 유대인들의 복장입니다. 하레디'란 명칭은 히브리어로 두려움 또는 경외를 의미하는 '하라다'라는 단어에서 나왔고, 복수형은 '하레딤'이라고 합니다.남성은 검은 정장과 챙 모자, 하얀 셔츠를 착용하고 수염이랑 옆머리를 길게 기르며, 여성은 긴 치마에 목과 팔을 덮는 옷을 입습니다. 여기서 검은 옷을 입는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추모하고 슬퍼하기 때문에 입는 것인데, 이는 성전이 파괴된 시대에 살지 않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성전 파괴의 죄가 후대 유대인들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Q. 칸타타와 오라토리오는 어떻게 다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칸타타칸타타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노래하다'(cantare)라는 말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이 장르는 바로크 시대 초기에 변주된 유절형식(strophic variations)의 모노디 아리아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이 되어 칸타타는 다악장 형태의 성악곡이 되었고, 이 때부터 오페라, 오라토리오와 함께 바로크 시대의 3개 성악장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칸타타의 가사들은 대채로 사랑의 내용을 극적으로 서술해내는 양식이였고, 종종 교훈적이 내용이 다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칸타타의 음악은 가사에 맞춰 레치타티보와 아리아, 아리오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독창과 계속저음으로 연주하였습니다. 칸타타의 아리아는 단순한 유절형식부터 변주된 유절형식, 반복베이스 형태, 2부분 형식, 3부분 형식, 다카포 형식 등으로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칸타타는 오페라와는 다르게 전체적인 연주 시간이 비교적 짧습니다. 또한 무대 장치나 정해진 의상이 없고, 실내에서 소수의 청중을 대상으로 연주되었습니다.초기의 칸타타는 대부분 베네치아에서 작곡되고 출판되었지만, 칸타타의 중심지는 로마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오페라 작곡가들이 칸타타를 작곡했는데, 그 중 중요한 작곡가로는 루이지 롯시(Luigi Rossi, 1597년 ~ 1653년)와 쟈코모 카릿시미(Giacomo Carissimi, 1605년 ~ 1674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든 분야의 곡들을 많이 작곡하였는데, 그 중 루이지 롯시는 300여 개의 칸타타를, 그리고 쟈코모 카릿시미는 150여 개의 칸타타를 작곡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존재합니다.하지만 17세기 중엽보다는 17세기 말엽에 이르러 칸타타의 절정이 찾아왔는데, 그 중심에는 알렛산드로 스카를라티가 있으며, 약 600여 개의 칸타타를 작곡하였습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이탈리아 칸타타가 정형화되었는데, 이 형태는 서주적 신포니아에 이어 나폴리 양식의 양식의 레치타티보와 다카포 아리아가 짝지어서 두 번 나오는 것입니다. 칸타타는 독창과 계속저음의 반주를 갖는 소규모 실내악 형태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자주 발견됩니다. 칸타타가 계속저음 이외에 기악 앙상블의 반주(ritornello)를 가진 경우도 나타났으며, 독창, 이중창, 또는 그 이상의 독창자를 갖거나 합창이 들어가는 경우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결혼식용이나 축제용, 교회용 등 다양한 용도의 칸타타도 등장했습니다. 이탈리아 칸타타는 1700년 이후에 프랑스와 영국, 독일에 퍼져 각 나라의 양식과 융합을 하면서 재차 유행을 하였습니다. 특히 독일 칸타타는 루터교회와 연관되면서 더욱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2. 오라토리오독일의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 카톨릭 교회에서는 일종의 혁신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운동은 미사 또는 다른 전례행사 이외에도 개인적인 신앙을 권장하는 운동이었는데, 그런 운동 중 하나가 '영적 훈련' 을 위한 기도모임이었으며, 이를 이끄는 사람은 바로 이탈리아의 종교적 지도자 필립포 네리(Filippo Neri, 1515년 ~ 1595년)입니다.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수도원이나 교회의 오라토리오(oratorio, 기도실)에서 모임을 가졌고, 이 기도 예배에서 청중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한 종교 오페라가 공연되었습니다. 이 오페라는 당대의 음악양식으로 작곡되었으며, 표현력을 높이는 작업을 통해 작곡되었습니다. 이 대표적인 작품이 오페라의 탄생시기인 1600년대에 로마에서 공연되었던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Emilio de' Cavalieri, 1550년 ~ 1602년)의 《영혼과 육체의 극》(Rappresentatione di Anima et di Corpo)이라는 도덕극입니다. 이 작품은 3막극의 오페라로 총 91개의 곡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절형식의 아리아와 마드리갈, 레치타티보, 합창, 춤곡 양식의 신포니아, 리토르넬로 등으로 이루어진 종교적인 극음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인 느낌이 가미된 오페라의 전통은 한동안 그대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종교적인 주제에 약간 극적인 성격을 가진 대화곡들이나 독창, 합창, 관현악과 계속저음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장르에 '오라토리오'라는 명칭이 붙으면서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라토리오의 가사는 성서 구절에다가 창작되어진 시를 추가한 형태였고, 오라토리오의 음악은 오페라같은 극적 성악 장르입니다. 오라토리오는 규모 면에 있어서, 그리고 성격에 있어서 오페라와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해설자(historicus 또는 testo)를 포함하고 있으며, 합창을 강조하고, 보편적으로 무대장식이나 의상을 갖춘 뒤에 공연을 하지 않는다는 것들에 의해 오페라와 차이가 있습니다. 가사에 따라서도 오라토리오가 구분될 수 있는데, 라틴어 오라토리오와 이탈리아 오라토리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탈리아 오라토리오가 오페라와 함께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발전하였습니다. 바로크 시대 초기 라틴어 오라토리오 작곡가로는 로마 출신의 쟈코모 카릿시미가 있고,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입다》(Historia di Jephte, 1645년)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오라토리오의 대표적인 작곡가는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Alessandro Stradella, 1644년 ~ 1682년)가 있으며, 그에 의해 이탈리아 오라토리오는 더욱 정교해지고 색채감이 풍부해지게 됩니다. 이 외에도 독일과 영국에도 오라토리오가 인기있었는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에 의해 영국의 오라토리오는 발크 오라토리오의 절정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