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려는 외왕내제를 보였다고하는데 조선은 그렇지않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임금은 황제, 천자와 함께 (대)왕이라는 위호를 상황에 따라 강대세력들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는 대부분의 시기에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않았다. 태조대와 광종대 등에 잠시 연호를 정하여 사용한 적도 있지만, 대륙왕조와 사대외교가 없었던 때의 일이다.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외왕내제를 완전히 행하지는 않았으나, 황제가 쓰는 묘호를 사용하는 등 황제국의 예법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시절에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면서 칭제건원을 함에 따라 공식적인 황제국이 되었다.
Q. 조선은 일본과 어떤식으로 외교를 했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전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딱히 규칙을 정해놓지 않고 몇 번 오갔고 오닌의 난 이후로 일본 전역이 전란에 빠지며 중앙 정부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우치 등 지방 다이묘가 따로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교류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해 전국 시대를 끝내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직후에는 당연히 일본과 외교가 단절됐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사절단이 일본 각지로 70번 가량 방문했다.그러다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밖에 안 된 1607년, 그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정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임진왜란과는 상관없다는 언급을 하며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한 끝에 조선 조정이 이를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한다. 이후 포로 교환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3회에 걸쳐 사명당을 비롯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사절을 파견한다. 조선에선 원수였던 일본과 화해하는 게 달갑지는 않더라도 일본과 계속 사이 나쁘게 지내면 언젠가 다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또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 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을 멸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도쿠가와 입장에선 새로 집권하긴 했지만 1615년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는 도요토미 파벌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한 상태라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던 데다가 그는 조선을 공격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조선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이득이었다.그 후 에도 막부 시기인 1811년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답겸쇄환사가 3번,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쇼군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거나 태평성대가 오래 유지되는 것을 축하한다는 등 갖가지 명목으로 파견되었지만 회답겸쇄환사까지 포함하여 6회째인 1655년부터 새로운 쇼군의 취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보내졌는데, 쇼군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으므로 비정기적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해 육로로 동래까지 간 다음 배를 타고 오사카, 강을 거슬러 교토까지 가서 에도까지 이동했다.
Q. 조선시대 왕들은 화장실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과 왕비는 외진 곳에 설치된 측간을 이용하지 않고 ‘매화(梅花)틀' 또는 ‘매우(梅雨)틀'이라고 하는 이동식 변기를 이용하였다. 임금의 얼굴을 ‘용안', 몸을 ‘옥체', 식사를 ‘수라'라고 높여 부르듯이 임금의 대변과 소변을 ‘매화열매(梅)'와 ‘비(雨)'라고 높여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매우틀은' 높이 30cm 정도의 나무상자에 빨간 우단으로 감싼 것으로, 변을 담을 수 있는 구리 그릇을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도록 한글자음 ‘ㄷ 자' 형태로 제작되었다. 임금이 속이 불편하다는 신호를 보내면 급히 복이나인과 궁녀들이 사방으로 휘장으로 감싸고 가운데 매우틀을 대령한다. 임금이 매우틀 위에 걸터앉아 용변을 본 뒤에는 복이나인이 비단으로 뒤를 닦아주고 매우틀은 왕실 전용 병원인 전의감에 보내어 변의 모양, 색깔, 냄새 등으로 임금의 건강을 살피는 것이다.
Q. 의열단에 폭탄을 제조해준 헝가리인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마쟈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몽골에서 의열단원 이태준을 만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이태준을 도와 몽골을 경유하던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연락과교통편 등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한편, 중국 관내 지역에서 의열투쟁을 계획하던 김원봉은 앞으로의 활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위력이 큰 폭탄과 권총 등의 무기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뜻밖에도 베이징에서 이태준을 만나 헝가리 폭탄기술자 마쟈르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몽골에 있는 그를 데리고 오겠다는이태준이 운게르 부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마쟈르는 이태준이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신으로 베이징에 와 김원봉을 찾았다. 식민지조선의 처지가조국 헝가리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한국을 극히 동정하던 그가 독립운동을 돕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상하이로 가 프랑스조계 내에 폭탄제조소를 차렸다. 의열단원 및 몇몇 중국인들이 그를 도와 폭탄을 제조하였으며, 모든 과정은 순조로웠다. 김원봉은 마쟈르의 폭탄을 이용해 제2차 암살·파괴계획을 추진하였다. 문제는 폭탄을 국내까지 반입하는일이었다. 폭탄 이동 노선은 상하이 ‒ 톈진 ‒ 안동 ‒ 경성이었다. 이때 마쟈르가 상하이에서부터 톈진까지 폭탄등 무기 운반을 맡았다. 서양인들은 치외법권의 적용을 받아 비교적 안전하였기 때문이다. 톈진에 도착한 무기는 무사히 압록강 국경을 넘었지만, 의열단 내 밀정의 신고로 일본에게 발각되면서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마쟈르의 폭탄을 본 일본은 경악하였지만, 의열단이 이 같은 고성능의 폭탄을 직접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대했던 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폭탄제조 기술은 의열단원들에게 계승되어 이후 의열단이 무장투쟁을 추진하는 큰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