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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문/예술 전문가 김준태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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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전문가
동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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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과거 스페인의 함대에 무적함대라는 닉네임이 붙게된 연유는무엇인가요?
Armada Invencible, 16세기 지중해와 대서양을 누비던 스페인 해군의 영예(?)로운 이명이다.이 함대의 정식 명칭은 "위대하며 가장 축복받은 함대(Grande y Felicísima Armada)"이다.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는 일종의 별칭이었으며 한국에서 '무적함대'를 뜻하는 말로 알려져 있는 '아르마다(Armada)' 는 그냥 함대라는 뜻이다[1]. 그 이유는, 위의 정식 명칭 자체가 원래 스페인 해군을 부르던 말이 아니라 1588년에 칼레 해전에서 잉글랜드와 교전하라고 편성한 해군 함대에 새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1588년, 영국과의 칼레 해전에서 패배했을 때 전투로 입은 손실은 3척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 잉글랜드의 화공을 피해 분산 회피하여 전열을 가다듬다가 갑작스런 두 번의 태풍으로 인한 비전투 손실로 81척을 잃는다. 칼레 해전 이듬해, 드레이크-노리스 원정(Drake-Norris Expedition)때 스페인 본토를 공격해 들어온 대규모 잉글랜드 함대는 스페인 영주들의 지방함대를 맞아 전투에서 그야말로 탈탈 털려버린다. 이때도 잉글랜드 지휘관은 칼레해전 때와 같은 프랜시스 드레이크였는데, 영국군은 11000명 에서 15000명이 전사했고 40척이 침몰 또는 나포되었다. 스페인군은 백병전 등으로 900명이 전사하고 배들은 하나도 침몰되지 않고 멀쩡했다. 드레이크 노리스 원정이 진정한 스페인 해군의 위용을 보여준 셈. 이후 스페인 왕실과 지방영주들, 포르투갈 해군은 영국 해적들을 상대로 여러 중소규모 전투에서 대부분 승리 하며 10 여년에 걸쳐 세계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스페인 지방 영주들 또한 대항해시대에 많이 참여하게 된다. 갈레온 무역 등 공무역을 제외 하고는 대서양과 태평양의 사무역, 밀무역은 거의 지방 영주들의 담당이었다. 이러한 경향성은 펠리페 2세 사망 이후 재상들에게 정치를 의존했던 비교적 왕권이 낮은 국왕들이 즉위하면서 두드러진다.애초부터 무적함대라는 이름은 칼레 해전 이후, 잉글랜드가 조롱조로 부각시킨 이름이다. 그러나 단순히 조롱만 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정치적인 노림수가 있었는데, 당시 잉글랜드와 스페인 간의 전쟁은 개신교(성공회)와 가톨릭 간의 종교 전쟁의 성격을 띠었는데 '인간이 만든 무적함대'를 '신이 보내신 바람'에 의해 물리쳤다는 식으로 선전하는 것은 우리 쪽 신앙이 진짜라는 정통성을 확보하기에 좋은 수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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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음악의 음표는 누가 만들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준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음표는 피타고라스 수학자가 기원전에 만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음표는 4분음표 8분음표 16분음표 32분음표 64분음표 등으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대장간을지나다 대장장이의 망치소리를 듣고 종이에 음표를 만들었다는 설입니다.최초의 악보를 만든 사람은 이탈리아의 구이도 다레초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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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단맛을 내는 방법이 고안 된 건가요?
안녕하세요.중국 후한(後漢) 말 유희(劉熙)가 지은 《석명(釋名)》에 ‘묽은 엿은 이(飴)라 하고 된 엿을 당(餳)이라 하며 이보다 딱딱하면서 탁한 엿은 포(餔)’라고 하여 엿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또한 6세기 전반에 나온 농서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싹이 푸른 엿기름은 검은엿을 만들 때에 사용하고, 희게 싹을 틔운 엿기름은 흰엿을 만드는데 사용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서 엿을 먹어온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답변에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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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전통주 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게
한국사에서 술에 대한 첫 기록은 중국 서진 사람 최표가 쓴 고금기에 함께 실린 고조선 시대의 조선현(오늘날의 평양시)에서 지어진 공무도하가에 대한 해설문으로, 백발의 광인이 술병을 쥐고 강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술이 한국사 관련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이런 공무도하가와 관련된 기록 및 정사 삼국지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들 그리고 유적과 출토되는 유물들을 살펴봤을 때 한민족은 고조선 시대부터 술을 만들어 먹었고,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그리고 후삼국시대에도 술의 명맥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라 제19대 눌지 마립간이 신하들과 가진 잔치에서 술을 마시는 순서가 3번 돌아가고 음악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에서 술자리 예절이 생길 만큼 음주가 일반화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 중후기에는 원나라를 통해 아랍의 증류 기술이 전파되어 증류식 소주 등 증류주를 빚기 시작했고, 이러한 증류주들의 내력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최소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밥 대신 막걸리로 혀에 착착 들러 붙는 탁주, 맑고 향기로워 식사 반주에 제격인 청주, 청주에 여러가지 부재료를 넣은 약주, 청주나 탁주를 증류한 소주, 소주에 과실이나 부재료를 침전시킨 약소주, 청주에 증류식 소주를 넣어 보존성을 향상시킨 과하주, 그리고 이 술들을 섞은 칵테일인 혼돈주까지 다양한 술이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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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통령님께서 대외 활동시 대본이 있습니까
*본문 작성시 정치적 견해는 없으며, 정보수집중 가장 정보가 많이 나와있는 것을 수렴하였습니다.*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의 대통령 연설문은 직접 관여하고 전문가의 조언과 비서관의 업무협조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시스템이 제대로 잡힌 세계의 국가들이 하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은 본인의 주관이 뚜렷해서 연설문 작성에도 주장이 강했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 같은 경우엔 주위에서 그런 표현을 쓰지 말라고 조언해도 소탈한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고 합니다. 원래 성품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목에 힘을 주는 것을 싫어했었기 때문입니다.국정 연설이 예정되면 대통령 연설문이 작성되기 시작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연설문 작성을 위해 비서관과 자리를 갖고 연설에 들어갈 내용들을 직접 구술했습니다. 그러면 비서관은 일일이 메모하고 점검하여 대통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워낙 논리적이고 달변이었기 때문에 구술 그대로 글로 옮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뜻이 제대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설비서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대통령 연설문 작성이 이렇게 전문적으로 확정된 것도 노무현 대통령 때의 입니다. 김영삼 정부까지는 연설문이 공보수석실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박정희 정부 이후 제왕적 대통령들은 연설이 아니라 교시에 가까웠기 때문에 업무도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때에 공보수석실 내에 연설 담당비서관이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에 와서는 대통령 비서실장 직속으로 연설비서관이 완전히 독립을 하게 됩니다. 국민과의 소통을 즐기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국민에게 직접 연설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던 대통령이었습니다.주장과 의견수렴이 있는 대통령 연설문 직접 말을 전달하는 구술 과정이 끝나면 연설비서관은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한 후 노 전 대통령에게 이지원 시스템을 통해 보고 합니다. 이지원 시스템은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 전자업무 시스템입니다. 노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해서 'KnowHow'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정도로 시스템화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책임이 분명하고 투명한 정부업무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제3자가 국정개입을 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이지원 시스템을 통해 대통령 연설문을 전달받은 노 전 대통령은 컴퓨터로 접속하여 직접 수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너무 잘못 썼다고 생각되면 연설비서관을 직접 불러서 다시 설명하고 수정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연설문이 작성되면 중요한 사안이 있을 경우에는 독회라는 것을 열었습니다. 독회는 비서실장과 관련 장관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입니다. 참모진의 의견을 수용해서 최종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을 잡아내는 절차인 것입니다. 당시의 연설비서관의 증언에 의하면 매우 꼼꼼하게 처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서실장의 증언에 의하면, 주장이 강한 노무현 대통령이었지만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삼갔다고 합니다. 대체로 제왕적 대통령들은 수석회의에서도 일방적은 전달에 가까운 회의를 하지만, 노 대통령은 일개 참모에게도 발언의 기회를 줬으며 열띤 노론을 통해서 결론 짓는 방식을 선호했었다고 합니다. 대통령 연설문의 내용도 중요한 국정사안이 내용이라면 참모들의 의견을 구한 뒤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결정하는 방법으로 초안이 작성되었습니다. 대통령 연설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의견수렴까지 마치고 나면 대통령 연설문은 마무리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때부터는 외부열람이 불가능하고 대통령 본인과 보조관인 연설비서관이 마무리를 합니다. 연설비서관은 마지막 검사는 대통령이 다시 했고, 그 사이에는 심지어 비서실장도 연설문을 볼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최종 마무리 후에는 어느 누구도 대통령 연설문을 수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후 대통령은 연설이 잡힌 날이 될 때까지 연설을 연습하기도 하고 심사숙고를 거듭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대통령의 연설문은 대통령 자신의 정책방향을 표현하는 자리이므로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 연설에서 부동산 투기를 강력히 제재하겠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담당인력이 동원되고 공적자금이 투입되며, 더불어 투기하던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누군가는 이익을 보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만약 사심을 먹고 누군가가 개입한다면 국기문란의 사태가 올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왕적 대통령은 이를 비판하는 자에게 오히려 국기문란을 일으킨다며 뒤집어씌우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감히 대통령에게 대드냐는 시각일 뿐 민주주의적인 바른 시각은 아닙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 과정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고 있는 나라라면 당연히 실행되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 과정을 형식적으로만 하는 대통령이 있다면, 자신을 대통령이 아니라 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노 전 대통령의 방식은 자기주장은 확고하되 남의 견제도 수렴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적 절차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 대통령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무조건 미워하고 어떤 사람은 무조건 찬양하며 평가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평가는 잘한 부분과 잘못한 부분을 나눠서 생각하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대통령이 잘한 건 따르고 못한 건 조심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본문 작성시 정치적 견해는 없으며, 정보수집중 가장 정보가 많이 나와있는 것을 수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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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국을 대표하는 소리에는 어떤것들이 있나요?
1) 거문고한국국악기 중 유일한 고유 현악기로 알려진 거문고.명주실을 꼬아 만든 여섯 개의 줄을 술대로 치거나손으로 뜯어서 연주한다. 비슷한 악기인 가야금보다는상대적으로 줄이 굵으며 다양한 음을 낸다. 2) 아쟁아쟁은 아시아 금쟁류 악기 중 유일한찰현악기다. 7개 또는 8개의 줄을 활로 문지르거나손가락으로 뜯어 소리 낸다.7줄의 대아쟁과 8줄의 소아쟁(또는 산조아쟁)이 있으며,독주나 합주, 반주 등에 두루 쓰인다. 3) 양금한국전통악기 중 유일한 타현 악기다. 18세기에 중국을 거쳐조선으로 들어왔고 궁중음악에 사용됐다. 원리는 양철사로 된 줄을대나무로 만든 채로 쳐서 소리 낸다. 사다리꼴 모양의 울림통위에 2개의 괘를 올려놓고그 위에 1조 4개의 금속줄을 한벌로 하며 열네 벌을 얹는다. 4) 대금대나무로 만든 가로저이다.대금은 6개의 지공이 있으며 취구라는 구멍에입김을 불어 넣어 소리 낸다.관대에는 취구와 지공 외에얇은 갈대청(갈대줄기 속에 있는 얇은 막)을붙이는 청공이 있으며,금속으로 만든 청가리개로 청공을 덮거나 열어청의 떨림을 조절한다. 음악의 갈래에 따라정악대금과 산조대금 두 가지가 있다. 5) 생황국악기 중 관악기. 17개의 가느다란 대나무 관대가통에 둥글게 박혀 있는 형태의 전통악기다.국악기 중 유일하게 화음을 낸다. 6) 박 관현합주와 궁중정재, 제례약 등의 시작, 악구의 종지등 춤사위의 전환을 알리기 위해 연주하늩 타악기다.여러 개의 나뭇조각을 부챗살처럼 폈다가 순간적으로딱!하는 소리를 내며 접어 올려 음악 진행의 변화를 보여준다. 7) 좌고좌고는 국악기 중 타악기. 북을 나무틀에걸어 놓고 앉아서 치는 악기다.관현합주 또는 삼현육각편성의 연주에 쓰이며,장구의 합장단이나 북편 연주에음량을 강화하기 위해 쓰인다. 8) 편종타악기 중 하나로 쇠붙이로 만들어졌다.편종은 2단의 나무틀에 매달린16개의 종을 각퇴(나무막대 한쪽 끝에소뿔을 달아 만든 채)로쳐서 소리 낸다. 16개의 종은 16음을 내며종의 두께가 두꺼울수록 높은 음을 낸다. 9) 편경 국악기 중 석부에 속하는 유율타악기 편경.2단의 나무틀에 매달린 ㄱ자모양의 16개 경석(옥돌)을각퇴로 쳐서 소리 낸다. 16개의 경석은 16음을 내며두께가 두꺼울수록 높은 음을 낸다.등이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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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수메르의 설형문자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인근 문명권에서 쓰였던 문자로, 쐐기 모양이기 때문에 설형 문자라고도 불립니다. 본래 수메르에서 수메르어를 표기하기 위해 개발되었다가 후대에 인근 문명권들의 언어인 아카드어, 히타이트어, 엘람어, 우라르투어, 에블라어, 후르리어, 루위아어, 팔라어 등을 표기하는데 쓰였고 우가리트어와 고대 페르시아어의 문자도 쐐기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쐐기 문자는 대개 점토판에 기록되었는데, 그 특성상 특별히 필기도구에 제약이 강하지는 않았으나 대개 갈대 가지를 뾰족하게 잘라 만든 철필로 썼으며, 기록물로 쓰인 점토판은 기록의 양에 비해 그 무게가 심각한 수준으로 무겁다는 단점이 있으나, 그늘에서 잘 말린 경우 보존능력은 돌을 깎아 새긴 것과 맞먹는 수준으로 후대에 등장한 파피루스, 양피지, 목간, 종이 등의 기록물보다 훨씬 보존성이 좋았다. 또한 재료를 구하기 쉽다는 것도 장점이었는데 그래서 남아있는 유물도 제법 많은 편이라고 합니다.기록된 점토판을 불에 구우면 굉장히 단단해지고 이렇게 남은 유물도 꽤 있구요, 이 경우는 그늘에 말리는 것보다 내구성이 더 올라간다고 합니다. 다만 기록자가 자의로 구웠던 경우는 적습니다. 대부분의 쐐기 문자 점토판은 가벼운 편지나 영수증 같은 기록이라 평시의 보존이 목적이면 그늘에 말려도 되고. 진짜 오래 보관할 목적이면 함무라비 법전처럼 돌에 새기지 굳이 귀한 연료를 써가며 불에 구울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점토판이 불에 구워진 이유는 그것을 보관하던 건물이나 도시가 전란 등의 이유로 싸그리 불타면서 본의 아니게 점토판이 불에 구워져 버린 것이다. 어쨌든 전란이나 자연재해로 소실되기 쉬운 파피루스나 양피지와 달리 점토판은 전란이나 화재 덕분에(?) 오히려 더 단단하게 구워져서 후대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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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왼손 오른손 의미하는게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준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악보상에 나타나있는 박자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오케스트라 각 파트별로 싸인을 지휘자가 편안한 손으로 주는것이기도 합니다.오른손이 주로 사용하는 손이면양손으로 박자를 하고있다가 특정악기가 쉬고있다가 나와야 하는 부분이면 왼손은 박자를 오른손은 연주하라고 싸인을 줍니다^^답변이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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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유명한 유럽의 인상파 화가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준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상파 화가인상파 화가들은 일 드 프랑스, 노르망디, 브르타뉴, 남부 지방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경치를 표현했다. 인상파 화가 중에는 마네, 르느와르, 드가, 모네, 시슬리, 세잔, 부댕과 같이 매우 잘 알려진 예술가들과 귀요맹Guillaumin, 프레데릭 바질Frédéric Bazille,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o,베르트 모리소 Berthe Morisot가 있다. 살롱에서는 점묘화의 화가들과 조지 쇠라Georges Seurat가 함께한 후기 인상파, 퐁 아벤Pont-Aven 학파와 폴 고갱, 나비Nabis 와 툴루즈-로트렉, 초기 표현주의와 반 고흐를 향한 새로운 방향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몇몇 인상파 화가들은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했으나, 그들의 작품은 오늘날 엄청난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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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더운여름날 삼계탕을 먹게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준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왜 복날 삼계탕 먹을까 = 삼복은 1년 중 가장 더운 기간이다. 땀을 많이 흘리고 체력 소모가 큰 여름, 몸 밖이 덥고 안이 차가우면 위장 기능이 약해져 기력을 잃고 병을 얻기 쉽다. 닭과 인삼은 열을 내는 음식으로 따뜻한 기운을 내장 안으로 불어넣고 더위에 지친 몸을 회복하는 효과가 있다.◇ 삼계탕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 사육한 닭에 대한 기록은 청동기 시대부터지만 삼계탕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서조차 찾기 힘들다. 조선 시대의 닭 요리는 닭백숙이 일반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부잣집에서 닭백숙, 닭국에 가루 형태의 인삼을 넣는 삼계탕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삼계탕 형태는 1960년대 이후다. 대중화 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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