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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인도가 성범죄로 유명한 국가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인도는 여전히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와 가부장적인 문화가 존재합니다. 여성에 대한 권리와 자율성이 제한되어 있으며,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은 성버죄를 부추기는 요소로 자용할 수 있습니다.인도에서 성범죄가 많은 이유 중에 여성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이 영향을 미치는 이유가 있습니다.성별 차별과 가부장적 문화 : 인도 사회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인 문화와 성별 차별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남성 우월주의, 가정 내 폭력, 결혼 관련 강요 등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며,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교육 및 경제적 차이: 교육 및 경제적 차이도 인도에서 성범죄의 원인 중 하나입니다. 여성들 교육 기회와 경제 자립 기회가 제한되어 있어 사회적 지위가 약화하고, 취약한 위치에 놓일 수 있습니다. 법과 집행 체계의 한계: 법과 집행 체계의 한계는 성범죄 예방과 처벌에 영향을 줍니다. 신고 절차의 복잡성, 재판 절차의 지연, 피해자 보호 부족 등으로 인해 성범죄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문화적 태도와 인식 : 일부 인도 사회에서는 여성의 자율과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문화적 태도와 인식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범죄를 용인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형성할 수 있으며, 예방 및 신고 문화 형성을 어렵게 만듭니다.공공장소의 안전 부재 : 일부 지역에서는 공공장소에서의 여성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적절한 조명, 약자 보호 시설의 부재 등은 여성들이 노출될 가능성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인도에서의 성범죄 예방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개혁, 법과 집행 체계 강화, 문화적 변화 등 다양한 차원에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여성들의 권리와 안전을 보호하고, 사회 전반에서 성평등을 추구하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Q.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활을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나라 활의 역사는 고조선의 단궁(檀弓)에서 비롯되는데, 단궁은 목궁(木弓)으로서 삼국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는 신식무기 각궁의 전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궁에 관한 기록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들 수 있는데, “예(濊)는 창[矛]을 만드니 길이가 3장(丈)이나 되어 몇 사람이 이를 들어야 한다고 하며, 또 보전(步戰)에도 능하고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이 나라에서 나온다”는 기사가 보입니다.이 단궁은 부여·동옥저 등 여러 나라에서 모두 사용된 활이며 삼한(三韓)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낙랑단궁이란 조선단궁을 말하는 것으로서, 중국과 다른 우리 고유의 활, 즉 각궁의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유득공(柳得恭)의 『사군지(四郡志)』에 보면 “속(俗)에 단(檀)을 일컬어 박달(朴達)이라 하는데 박달나무로 활을 만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궁의 궁재(弓材)가 과연 박달나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진서(晉書)』 숙신전(肅愼傳)에 “석노(石弩)와 피골(皮骨)로 만든 갑옷이 있는데, 단궁은 3척 5촌이요 그 화살인 호시(楛矢)는 길이가 1척 8촌이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단궁이 단궁(短弓)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Q.  우리나라에 중화요리는 언제 처음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식 중화 요리는 초기만 해도 정착한 화교들 다수가 산둥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산둥성 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만주족 요리의 영향이 강한 만주 요리의 영향도 받았는지 만주 요리인 물만두나 군만두와 같은 요리가 나오기도 합니다.한국에 정착한 화교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으나, 근대 들어 한국에 본격적으로 화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임오군란 이후 유입된 청나라 상인들이나 쿨리 등이 시작입니다. 다른 화교들도 그렇지만 이들은 음식점 사업, 건설 노동자로 유입 되습었다.이들이 초기 주로 활동했던 곳은 짜장면이 탄생한 곳이라고도 알려진 인천 월미도 근처의 조계지였으며, 쿨리 노동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다가 점차 고급화하여 부유한 한국인과 일본인들까지 상대하는 음식점이 성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때는 청나라 음식이라고 청요리라고도 했는데, 화교 인구가 많았던 서울이나 부산에도 유명한 청요릿집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당대 한국 사회에서 청요리집이 차지하는 위상은 염상섭의 소설 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조상훈이 친구들을 불러모아 집에서 몰래 마작판을 벌이면서 청요리집에서 요리와 함께 빼갈을 배달시키고, 이 마작 모임에서 시중을 드느라 쉬지도 못하는 집안의 하인들이 '하다못해 요리라도 좀 남아있으면 기름진 청요리 맛이나 보는 재미로 참을 텐데 걸신 들린 것처럼 접시를 싹싹 비우니 힘들기만 하고 좋은 게 없다'고 투덜거리는 장면이 나옵니다.이렇게 1930년대 한국에서 청요리는 가난한 사람들은 맛보기 힘든 별미로, 술과 도박으로 방탕하게 흥청망청 노는 자리에 어울리는 기름진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것이었고 당대 문학작품에서도 비싼 접대를 하는 배경이 청요릿집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집이 고급 레스토랑과 같았습니다. 이는 현대 한국에서도 고급 중식당이 접대 장소나 거래 장소로 기능하는 것과 같습니다. 1920년대 후반의 조선공산당 사건도 중국집에서 공산당원 젊은이들이 일본인 공무원과 친일파들을 때려눕힌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그리고 대도시의 청요릿집은 홀이 아닌 방이 따로 있어 사업 접대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당시 중화요리점이 밀실 정치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타인과 격리되어 은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다 코스 요리를 시키면 오랫동안 않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여유롭게 논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오래된 중국집에 가면 10명 내외의 소그룹이 식사를 하며 조용히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별도의 룸을 만들어 놓은 경우가 있습니다.현대에도 별도의 방이 마련되어 있는 중국집이 있고 이런 방은 대가족 식사나 직장인 회식 용도로 예약을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또한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을 보더라도, 한국전쟁 직후 가난했던 시절로서는 드물게 호사스러웠던 주인공의 결혼식 풍경을 설명하는 장치로 등장하는 것이 청요릿집을 빌려 벌인 피로연과 기름진 청요리를 양껏 먹는 가난한 친척들의 모습입니다.한국식 중국 요리가 끈적하고 진하고 기름진 맛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 역시, 20세기 초 중반 그나마 서민도 종종 즐길 수 있는 호사의 상징 중 하나가 중국 요리였던 것과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습니다.일제강점기 시기를 거치며 일본 문화의 영향도 제법 받았습니다. 일단 우동, 짬뽕이란 단어부터가 일본식 발음이고, 밑반찬으로 단무지와 양파가 포함된 것과 그 양파를 과거엔 '다마네기'라고 꽤 불렀던 것도 이러한 영향의 일부분 입이다.이쑤시개를 '요지'로, 요리사를 '이다바'로 불렀던 것 등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예 일본어가 섞인 야끼만두, 야끼우동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당시엔 고급 요리였던 청요리집에 자주 방문할 수 있었던 계층은 부유한 일본인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영합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Q.  조선시대 초요갱이란 인물에 대해서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초요갱'은 조선왕조실록에 16차례나 등장한 기생의 이름입니다.세종대왕의 세 아들들이 사랑했던 여인으로 평원대군, 계양군, 화의군이 모두 그녀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다가 유배를 간 왕자도 있었다는데요. 초요갱은 역사적인 순간, 극적인 순간에 여러 차례 실록에 등장하며 조선을 흔들었던 실제 역사 속 화제의 인물이었습니다.궁중 악사 박연의 수제자로 궁중악의 유일한 전승자였던 초요갱은 뛰어난 재능과 미모가 가혹한 운명과 만나며 예술적 재능이 빛나는 예인(藝人)으로 살지 못하고 실록에 이름을 올리는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했던 비운의 기생이었습니다."지금의 명나라가 있기 전 그러니까 당나라보다 더 훨씬 앞선 시기인 초나라에 영왕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영왕이 사랑했던 여인이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웠다고 하더구나.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켜 초요(楚腰)라 불렀단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글자는 미녀 갱(妔) 자를 써서 '초요갱'이라 지었다."​허리가 가는 초나라의 미녀를 닮은 조선 전기 최대의 스캔들의 주인공 '초요갱'의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인데요.사실 초요갱이라는 기생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조선시대 최고의 기생이라 하면 '황진이'가 가장 유명할 듯싶은데요. 누구나 다 아는 기생 황진이는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초요갱은 무려 열여섯 번이나 그 이름을 올렸습니다.​우리는 잘 몰랐던 기생 초요갱,그럼에도 조선의 역사에 너무도 자주 등장했던 기생 초요갱!​도대체 그녀는 누구였고,도대체 그녀는 왜 조선실록에 등장했던 것일까요?초요갱은 원래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어느 양반 댁의 첩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안이 역모와 연관되어서 관기가 되었다고 합니다.역모에 관련되어 망한 집안의 여인들은 보통 노비가 되기 마련이었는데 초요갱은 춤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던 덕분에 노비 대신 관기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예인의 운명을 타고난 초요갱이 평원대군과의 만남을 통해 왕실과 연을 맺으면서 정치사에 휘말린 채 뒤틀어져 버린 인생이 시작됩니다.​처음 초요갱에게 빠져버린 왕자가 평원대군 이임이었는데요. 세종대왕과 소헌왕비 사이에 태어난 일곱 번째 아들인 평원대군 이임은 인품도 훌륭하고 총명하여 세종과 조정 대신들에게 사랑을 받는 대군이었답니다.평원대군은 초요갱을 첩으로 삼고 글도 가르쳐 주고 나라에서 만든 춤도 가르치며 아꼈다고 하는데요.​그런 평원대군이 19세의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하게 되면서 초요갱은 또 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과부가 된 초요갱에게 다가온 세 번째 남자는 세종대왕의 아들 중 한 명인 '화의군 이영'이었습니다.​화의군은 세종대왕과 영빈 강 씨의 아들로 평원대군과는 이복형제인 관계인데 제수씨인 초요갱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화의군은 초요갱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했고 그 마음에 감복한 초요갱과 깊은 연인 관계가 되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화의군과 평원대군 두 왕자들이 한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은 패륜이 되었습니다.​"이유는 본래 죄명이 없었으나 이영과 초요갱은 간통 사건으로 죄를 받았고 무인 등은 사사로이 모였기 때문에 죄를 받았으니 그 죄명을 드러내어 사뢰지 아니한 바가 아니므로 모두 죄명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초요갱은 금수와 다름이 없으므로 족히 책할 것도 못되나 그러나 세종조에 새로 제정한 악무를 홀로 능히 전습하였고 다른 사람은 이를 아는 자가 드무니 고향의 고을에 내칠 수가 없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초요갱에 관한 글입니다.단종 3년 1455년 화의군 이영이 금성대군 이유의 집에서 무사들과 함께 활쏘기 경연을 하며 잔치를 벌였는데 수양대군이 이를 반역을 도모하는 군사훈련으로 몰며 문제가 시작된 것인데요.수양대군이 단종에게 화의군과 금성대군을 역모죄로 처벌할 것을 요구하자 단종은 이를 거부했고 수양이 재차 화의군을 간통으로 몰아 처벌할 것을 몰아붙인 것입니다.결국 화의군 이영은 제수씨와 간통한 죄로 유배를 가야 했고 초요갱은 곤장 80대의 중형을 받게 되었습니다.초요갱은 형벌을 대속한 덕분에 직접 곤장을 맞지는 않고 한양에 머물러 살며 조용히 잊히는가 싶었는데 세조 3년에 또다시 사고가 터집니다.​세종 말년 좌의정을 지냈던 신개의 막내아들이자 수양대군의 세조 즉위를 도왔던 인물 '신자형'이 초요갱에게 완전히 푹 빠져버려서 본처를 내쫓아버리고 안방에 들이 앉힌 것입니다.조강지처를 버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신자형은 관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버렸는데요.엎친 데 덮친다고 이번에는 신자형의 7촌 조카뻘인 '안계담'이 초요갱을 탐하려고 신자형의 안방까지 들이닥쳤고 초요갱을 찾지 못한 안계담이 화가 나서 신자형의 노비들을 마구 구타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초요갱'에게 미친 남자들의 쟁탈전에는 왕실에서 미관말직까지 귀천의 구별이 따로 없었던 것인데요.​남자들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아니면 초요갱이 문제였던 것일까요?사실 초요갱은 기녀이기 이전에 뛰어난 예인이었고 궁중 악사 박연의 수제자였습니다.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궁중 무용의 유일한 전수자로 '악적'에 올려진 '여악'이었으니 세조 때에는 궁에서 연회가 있을 때마다 궁중 악무를 추곤 했다는데요.이번에는 화의군 이영의 동복동생인 '계양군 이증'이 초요갱을 범하고 말았습니다.​세조는 몹시 화를 내며 "동복형이 취한 형을 어찌 서로 간음하는가"라며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계양군은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며 자신은 초요갱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우긴 후 궁을 나왔다고 하는데요.이날 실록의 기록에는 계양군이 세조에게 혼쭐이 났음에도 바로 그날 밤 초요갱의 집에서 그녀와 동침을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초요갱에 푹 빠져 살면서 허구한 날 술을 마시던 계양군은 나이 4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남이 장군을 비롯한 세조의 측근 세력들이 예종의 왕위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는데요.​초요갱은 이때도 등장합니다.예종 1년의 실록에 '난신의 첩 초요갱'이 나오는데요.이때 고위 관리의 첩이었던 초요갱도 함께 축출됩니다.​그리고 다시 초요갱이 평양 기생으로 등장을 하는데요.세조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국상 기간 중에 평안도 도사인 '임맹지'가 초요갱과 간통을 했다고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이 사건을 끝으로 '초요갱'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실록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초요갱은 총 16 차례나 그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기록을 세운 것인데요.​초요갱을 만난 남자들은 모두 그 끝이 좋지 않았고 초요갱은 자신의 뜻에 상관없이 '요부'가 되고 말았습니다.역사의 굴곡 속에서 초요갱 개인은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권력 있는 남자들에 의해서 가혹한 운명에 스러져간 비운의 여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유교를 중시하던 조선 시대에 '예악'은 유교의 주춧돌이었습니다.​조선 시대 왕실이 주관하는 연주와 노래, 춤을 포함한 모든 음악을 총괄한 곳이 '장악원'이었는데요.장악원 소속 여악은 조선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들이었습니다. 악기를 다루고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울 뿐 아니라 시와 글에 능해 교양인으로 대우받는 특수 계층으로 자연스럽게 '예능 기생'이 되어 사대부 지배 계층의 여흥과 탈선 행각에 이용되는 폐해가 있었습니다.선비의 낮 문화가 과거와 관직 중심이라면 그 선비들의 밤 문화는 노비와 기생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과거제도와 함께 조선시대 양반 사회를 유지한 기생 제도의 핵심이 조선의 최고 예인들을 양성한 장악원이었고 장악원이 음악 기관이 아니라 기생 양성 기관으로 변질된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 조선 최고의 팜므파탈, 전설의 기생이 되어버린 초요갱의 실록 등장이었던 것입니다.
Q.  쌩택쥐페리의 책에는 비행기 조종사가 자주 나오는데 어떤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생텍쥐베리가 비행기 조종사였습니다. 아무래도 글 자체에 본인을 투영한 그 영향이 컸겠죠.그리고 그는 비행을 나간 뒤에 실종 됐습니다.기록에 따르면 생텍쥐페리는 1944년 7월 31일 오전 7시쯤 미국산 쌍발기 'P-38 라이트닝'을 개량한 정찰기를 몰고 프랑스 남부 코르시카의 비행장을 이륙한 뒤 종적을 감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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