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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이명훈 전문가
EBS
Q.  중동의 나라들은 모두 이슬람종교를 믿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단연 이슬람이 가장 높고 이슬람 종파도 두 종류로 나뉘어서 수니파가 85% , 시아파가 15% 입니다.시리아와 레바논에는 기독교 인구가 있기도 합니다.선교활동은 아무래도 비밀리에 진행하겠죠?
Q.  에펠탑이 만들어진 배경과 비밀의 방 내용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에펠탑은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에게 패한 치욕을 만회하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1889 파리 엑스포에 전시할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특히 영국이 자랑하는 최신 건물이었던 수정궁과 세인트 판크라스역을 의식하여 기둥간의 거리를 115m로 늘린 기계관(판크라스 역은 73m)과 300m 높이의 에펠 탑을 선보였으며, 일종의 기술을 과시하는 용도였기 때문에 원래는 20년간 설치했다가 해체할 예정이었습니다. 사실 건축적인 의의는 기계관이 더 크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대중이 느끼는 시각적인 충격은 에펠 탑이 압도적으로 뛰어났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에펠 탑만이 살아 남았습니다.비밀의 방은 구스타프가 자신이 사용할 비밀 아파트가 있다고 하네요. 그 안에는 원목 가구와 화려한 벽지로 꾸며졌고 그랜드 피아노와 작은 실험실까지 갖추어 있었다고 합니다.
Q.  노비 출신 승려 신돈이 공민왕의 스승이 어떻게 된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사》에서는 신돈의 법명, 출신지, 어머니의 신분만 적고 아버지에 대해 적지 않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고려사》에는 없지만 영산 신씨(靈山 辛氏)의 신예(辛裔)라는 인물이 신돈의 아버지 또는 형이라는 설이 있다.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은 옥천사(玉川寺)의 노비였는데 어린 나이로 출가를 하여 승려가 되었다. 승려가 되고 공민왕과 만나기 이전까지 뭘하고 살았는지는 《고려사》에 기록이 없다. 다만 고려 말의 학자 이달충이 신돈을 비판하는 시를 지은 바가 있는데 그 시의 각주에 매골승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매골승'은 '시신을 매장하는 일을 하는 승려'라는 의미로 미천한 신분의 신돈은 남들이 꺼리는 일로 생계를 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공민왕에게는 명덕태후 홍씨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공민왕이 꾼 꿈에서 자객을 만났는데 승려가 나타나 자객을 없애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원명의 소개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꿈속에서 본 승려와 행색이 비슷하여 마침내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노국대장공주 승하 뒤 공민왕이 정치에 뜻을 잃자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정치 전면에 나섰다. 이 때 그는 법명인 '편조'(遍照)를 버리고 환속하여 신돈으로 개명했다. 기록상으로는 신돈이 어떻게 공민왕과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매우 부실한데 《고려사》나 야사의 기록만 보면 신돈이 요승이라 공민왕을 미혹했다는 식으로 나오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단 미천한 신분인 그가 왕에게 소개될 정도였다면 뭔가 그가 세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래서 일각에서는 혼란한 고려 말기에 민중들 사이에서 불교 운동을 일으켰고, 상당한 추종 세력을 거느렸던 것이 아닌가란 추측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야사의 기록에 착안해서 신돈이 공민왕 시해 음모를 포착해 김원명을 통해 이를 고변했고, 공민왕과는 이를 계기로 만나게 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Q.  울산에 있는 석남사의 유래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석남사는 가지산 동쪽 기슭,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위치한 절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입니다. 가지산을 석면산이라고 하는데 이 산의 남쪽에 있다 해서 석남사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 신라 헌덕왕 16년(824) 도의국사의 창건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후 1674년 탁영, 선철선사 등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며 다시 순조 3년(1803)에 침허수일선사 등에 의하여 중수 되었습니다. 1912년 우운스님에 의하여 다시 중수된 바 있으며 1957년 비구니 인홍스님께서 주지로 부임하신 이래 각 당우를 일신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건물 동수가 모두 30여동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산하 80여 개의 선원 중 문경 봉암사와 더불어 종립특별선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석남사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 아래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세운 것이며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1973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웠습니다. 절 안에는 울주 석남사 승탑(보물), 3층 석가사리탑, 3층 석탑(지방유형문화재), 석남사 수조(문화재자료) 등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습니다.드라마 도깨비를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Q.  조선 후기 회화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 후기는 특히 두드러진 새로운 경향의 회화를 발전시킨 시대입니다. 가장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들이 이 시대에 풍미 했는데요. 이러한 후기의 회화는 세종조 때부터 꽃피웠던 조선 초기의 회화와 비교되는 훌륭한 것입니다.초기의 회화가 송대·원대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 했는데요. 이에 반하여 후기의 회화는 명대·청대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뚜렷한 민족적 자아의식을 발현 했습니다.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회화가 발전하게 된 것은 새로운 회화 기법과 사상의 수용 및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으로 믿어 집니다. 영조와 정조 연간에 팽배했던 자아의식은 조선 후기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죠.한국의 산천과 한국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다룬 조선 후기의 회화는 특히 주목됩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청나라의 강희(康熙, 1662∼1722년)·옹정(雍正, 1723∼1735년)·건륭(乾隆, 1736∼1795년) 연간의 중국 회화와 그곳에 전래되어 있던 서양화풍이 전해져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새로운 화법의 전개와 새로운 회화관의 탄생’에 기반을 둔 이 시대 회화의 조류로는, ① 조선 중기 이래 유행하였던 절파계 화풍이 쇠퇴하고 그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점.② 남종화법을 토대로 한반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 산수화가 정선 일파를 중심으로 하여 크게 발달한 사실.③ 조선 후기인들의 생활상과 애정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 등에 의하여 풍미한 점.④ 서양화법이 전래되어 어느 정도 수용되기 시작하였던 사실 등을 들 수 있다.남종화법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전대에 전래되어 있었던 것이나 본격적인 유행을 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 입니다.이 남종화법의 유행은 조선 후기의 회화가 종래의 북종화적 기법을 탈피하여 새로운 화풍을 창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켜 주었습니다. 또 남종화법의 전개에는 남종 문인화론이 뒷받침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대두되어 역시 참신한 화풍의 태동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후기의 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麟祥)·신위(申緯) 그리고 말기의 김정희(金正喜) 등은 남종화의 유행을 부채질한 대표적 인물들입니다.이러한 남종화법을 토대로 발전된 전형적인 한국적 회화가 바로 진경산수 입니다. 정선에 의하여 발전된 진경산수는 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경을 한국적으로 발전된 남종화법을 구사하여 그려낸 산수화를 말합니다.본래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삼아 그리는 화습은 이미 고려시대에 생겨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계속 전통의 맥락을 이어 왔습니다. 그러나 정선 일파의 진경산수는 비단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다룰 뿐만 아니라 남종화법을 토대로 하여 새로이 발전된 화풍을 지니고 있는 것이 큰 특색입니다.상상에 의한 관념적 산수화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보고 느낀 직접적인 시각 경험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음으로써 진경산수는 농도 짙은 생동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또한 시각을 당기는 구도와 개성화된 각종 준법, 농담이 강한 필묵법과 안온한 설채법(設彩法) 등은 정선과 그의 추종자들의 화풍을 더욱 한국적인 것으로 돋보이게 합니다.진경산수와 더불어 조선 후기 회화에서 가장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풍속화 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이미 조선 초기와 중기의 각종 계회도(契會圖)를 비롯한 기록화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속화(俗畫)라고도 불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역시 김홍도·신윤복·김득신(金得臣) 등 후기 화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되었습니다.김홍도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김득신은 주로 서민 생활의 단면들을 소재로 삼아 해학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양반만을 대상으로 양반만을 위해서 그려진 전 시대의 계회도와는 달리 그들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하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 후기의 서민들이 그들의 주인공이며, 초가와 논밭과 대장간이 그 주인공들의 활동 무대를 이룹니다.이러한 풍속화는 전시대의 회화에서 찾아보기 어렵던 새로운 것입니다. 서민들의 생활주변에서 찾은 재미있는 소재를 간결하면서도 초점을 이루는 구도 속에 익살스럽게 승화시킨 것이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가 지니는 큰 특색입니다.김홍도나 김득신과는 대조적으로 신윤복은 남녀간의 애정 문제를 파헤치는 데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인공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기보다는 인생의 즐거움과 ‘로맨스’를 누리는 한량이나 기녀, 양반 등이 대부분입니다.아직도 유교적인 규범이 엄하였던 당시에 남녀간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은 당시의 사회적 풍조를 고려해도 대담한 용기를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신윤복은 산수나 옥우(屋宇 : 여러 집채)를 배경으로 그의 주인공들을 섬세하고 유연한 필치와 산뜻한 채색을 구사하여 세련되게 표현했습니다. 이렇듯 신윤복은 소재의 선택·구도·배경 설정·필법·설채법 등 다각적인 면에서 김홍도나 김득신과는 큰 차이를 보여 줍니다.그러나 이들은 당시의 시대상이나 생활상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진지하고 적나라하게 묘파하였다는 데에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솔직하게 반영한 가장 한국적인 화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과거의 상당한 부분을 모를 뻔 했습니다.조선 후기의 회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국을 통한 서양화법의 전래와 수용입니다. 명암법과 원근법·투시 도법으로 특징지어지는 서양화법은 청조에서 활약한 서양인 신부들에 의하여 소개되기 시작했습다. 우리 나라에는 연경을 오고간 사행원(使行員)들의 손을 거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김두량(金斗樑)·이희영(李喜英)·박제가(朴齊家) 등의 일부 18세기 화가들에 의하여 수용되기 시작한 서양화법은 그 뒤에도 화원들이 그리는 궁궐의 의궤도(儀軌圖)나 민화의 책거리 그림 등에도 채택 되었습니다.그러나 이 시대의 화가들이 수용한 서양화법은 오늘날의 유화와는 달리 한국적 소재를 명암이나 요철법 또는 원근법을 가미하여 다룬 수묵화의 한 가지 였습니다.이 화법은 비록 널리 유행하지는 못하였지만 회화상의 근대화를 예시하는 중요한 것이었다고 믿어집니다. 아마도 이 화법의 전래와 수용은 19세기의 한국 회화가 이색적인 화풍을 형성할 수 있게 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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