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도산서원은 어떠한 이유때문에 유네스코에 등재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네스코가 ‘한국의 서원’을 평가하면서 꼽은 등재기준, 즉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는 크게 두가지다. 대상 유산인 9곳의 서원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까지 조선시대 지방 지식인들이 세운 대표적인 사립 성리학 학교이다. 등재 기준 중 첫번째로 꼽히는 ‘OUV’는 대상 서원들이 성리학 가치에 부합되는 지식인을 양성했고, 지역의 대표 성리학자를 사표로 삼아 제향(제사를 지냄)했으며, 무엇보다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이와 관련, “성리학자들은 서원에서 강학을 통해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세계를 이해했고, 정기적인 제향으로 학파의 결집을 도모했으며 교류를 통해 성리학에 부합한 향촌 교화활동을 주도했다”고 평가했다.두번째 ‘OUV’는 신청유산이 한국 서원 건축 유형의 탁월한 사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16세기 서원들이 처음 생길 때부터 정형화한 건축유형은 후대의 서원 건축에 모델이 되었다. 즉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 안향의 옛 집터에 건립됐듯 서원은 제향인물의 연고지역에 자리잡았고, 성리학자의 전인교육에 적합한 환경을 선택했다.여기에 제향과 강학, 휴식 공간으로 나뉜다. 제향공간은 사당을 중심으로 하며, 선현들을 위한 제사가 베풀어진다. 강학공간은 학습의 전당인 강당과 동·서재(기숙사)를 포함한 구역이다. 휴식 공간은 잠시 책상을 떠나 머리를 식히고 심신을 고요히 유지하는 수신의 영역이다.각 공간은 지형과 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뚜렷한 건축전형을 완성했다. 입지를 고를 때부터 무척 신경썼다. 도산·병산·옥산서원 등의 경우 앞쪽에 맑고 깨끗한 계류와 긴 여울이 감싸고,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언제라도 누각에 오르거나 창문만 열어도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의 입지 선정에 심신 수양의 환경을 첫손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각 서원의 기본골격은 비슷했다. 사당과 강당, 동·소재와 내·외삼문, 전사청(제수를 준비하던 곳), 장서각(도서관) 등의 부속건물로 구성됐다. 강당이나 누각, 정자, 연못, 계류의 이름도 반드시 지었다. 그러나 허투루 짓지 않았다. 강당의 경우 성(誠), 중(中), 경(敬), 의(義), 인(仁), 예(禮), 덕(德), 도(道), 교(敎) 등 성리학의 핵심개념을 표방했고, 누각이나 정자는 연(蓮)이나 매(梅) 등 옛 성현이 사랑한 꽃이름이나 풍(風), 월(月), 산(山), 수(水)자 등이 포함된 이름이 많았다. 이것은 서원이 학문과 덕성의 터전인 동시에 본성을 보존하고 정서를 함양하는 장수(藏修)의 공간임을 일러주고 있다.
Q. 허수아비의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어느 마을에 ‘허수’라는 농사꾼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힘들게 한 해 농사를 지어 논과 밭에 곡식과 작물들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가을철이 되면 뿌듯한 기분을 망쳐놓는 게 있었다.땀의 결실에 매일같이 달려들어 까먹는 수천마리의 새떼들 모습이 그것이었다. 한해의 결실을 지키기 위해 매일처럼 새떼와의 전쟁을 치르다보면 밥은커녕 뒷일 볼 짬을 내기도 힘든 형편이기 일쑤였다.그러던 하루는, 참새떼들을 쫓고 난 후 땀을 식히면서 뾰족한 수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번뜩 꾀 한 가지가 솟아났다.바로 궁즉통(弓則通) ! 짚으로 정성스럽게 사람모양을 만든 후 제 아비의 등걸 적삼을 입히고 모자까지 씌웠다.이것을 논 한 가운데 세워놓으니 새떼가 깜작 속아 날아드는 게 뜸했다.그러니 밥도 제 때에 챙겨먹고 뒷일도 편히 볼 수 있었다.헌데 동네 사람들이 이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논 가운데 서있는 것의 옷과 모자만 보고‘이보게 허수아비 나좀 봅세! 라고 멀을 골었다.그러나 대답이 없어 자세히 보니 진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그런데 그게 새떼들이 접근을 막는다는 사실을 알고 너도 나도 허수어비를 만들어 새워 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게 소문에 소문의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드디어 그 입소문, 말없는 말(言)이 천리를 달려,즉 무족지마(無足之馬)(말) 주천리(走千里) 라~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들은 임금님은 어명을 내렸다.‘온 나라에서 새떼에게 빼앗기는 곡식이 수만 석 일터! 그 귀한 곡식을 지혜로써,굶주릴 백성들 배불이 먹게했으니 기특한 허수에게 백민 1백석으로 포상하고 허수아비를 전구에 장려하노라!‘그 이후 허수아비라 명명된 이것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Q.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이 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갑신정변은 ① 일본군을 끌어들여 민심의 저항을 초래한 점② 고종의 이반과 권력 기반의 조성에 실패한 점③ 좌우영군의 장악을 소홀히 하여 이탈을 방조하고 무기를 정비하지 않은 점④ 독립과 개화라는 정변의 목표와 지향이 당대의 사회적 요구나 정서와 거리가 있었던 점⑤ 일본과 청이라는 외세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파악의 미흡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실패하였습니다.정변 실패 결과 참여자들에게는 적몰가산(籍沒家産), 파가저택(破家瀦澤)의 형이 집행되었고 부모, 형제, 처자에게도 연좌법이 적용되었다. 갑신정변 주도자 혹은 참여자 중 사망자 44명, 일본 망명자 9명, 유배자가 1명으로 확인된다. 이외에도 김옥균과 내통 혐의를 받은 자들은 숙청되었다.갑신정변은 나라를 팔고 겨레를 배반한 사건으로 이해되었고, 그 결과 개화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개화에 대한 인식 악화는 개화 정책의 중단, 개화세력의 위축, 여론을 등에 업은 수구세력의 반동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김옥균 등을 난적으로 규정하고 변란으로 규정하며 처벌 의지를 내비쳤다. 이어서 개화 정책 관련 기구를 폐지했고, 위정척사 계열 인물들을 대거 석방하였다.정변 이후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친청파들이 정국을 좌우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왕권 회복을 위한 물밑 작업을 진행하여 러시아에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는 조러밀약을 추진하는 한편, 1885년에는 개화 자강 업무를 추진할 내무부를 설립하여, 정부 정책면에서 정변의 반동과 역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다.일본측은 정변으로 소실된 공사관 건물에 대한 배상과 조선 정부측 사죄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885년 1월 9일(음력 1884년 11월 24일)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정변 후 청일 양국군이 주둔하던 상황에서 양국 간 개전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던 가운데, 주중영국공사 파크스(Sir Harry S. Parkes)의 중개를 통해 청일 양국군의 철수를 규정한 「텐진조약」이 1885년 4월 18일 체결되었다.특히 이 조약에서 장래 조선에 변란이 발생할 경우 청일 양국이나 한 나라가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알린다는 내용은 이후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일본이 파병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Q. 러시아는 어떤 이유로 알레스카를 미국에게 팔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개요1867년 10월 18일 오후 러시아 시베리아 보병 대대와 미국 제9 보병대대가 러시아-아메리카(Russian America)의 수도인 뉴 아크엔젤(NewArchangel)의 중앙 광장에서 서로 마주보고, 러시아 깃발을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는 공식행사를 준비했다. 이것은 러시아로부터 미국으로 알래스카(Alaska)를 이전하는 마무리 행사였다. 이 기념식은 북미 북서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의 약 70년간의 존재를 끝냈다. 러시아는 150년 전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후진 농업국으로 인식되던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 유럽의 경찰국가로서 당당하게 세계무대에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남하정책을 기본적인 대외정책으로 삼은 러시아는 흑해의 크림반도로 진출했고, 결국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열강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투르크와 크림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했습니다. 크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재정적 위기와 더불어 아시아 극동지역을 포함하여 해외에서도 전략적인 열세에 직면했고, 러시아-아메리카의 상황도 위태로워졌습니다. 결국 비엔나체제 하에 사사건건 러시아와 경쟁한 영국에 의해 정복당하느냐 미국에 파느냐의 전략적 선택에서 러시아는 영국에 적대적인 신생 미국에 판매함으로서 전략적인 우방을 만들 것을 결정했고, 알래스카를 미국에 판매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알래스카 판매의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게다가 알래스카의 판매는 당시 미국의 지정학적 야망과 러시아의 아무르강 연안과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려는 러시아의 의도가 잘 맞아 떨어진 경우로 보고 있습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알래스카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는 1867년 3월 초에 주미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트 스테클에게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슈워드와의 알래스카 매매에 관한 협상을 지시했고, 결국 3월 30일 새벽 4시, 면적이 거의 1,600,000km²에 달하는 알래스카를 미화 720만 달러(금)(1100만 루블금), 즉 헥타르 당 5센트 가격에 판매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2. 알래스카 매매의 역사적 배경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단기전략 목표에 휘둘려 러시아 제국 영토의 6%를 차지하는 해외 소유물을 처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에는 러시아의 많은 이들은 러시아-아메리카의 존재 자체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이 사건에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차르의 독단적이고 갑작스런 결정으로 금전적인 이익을 자의적으로 침해당한 러시아아메리카회사(RAC, Russian-American Company)의 주주를 제외하고는 알래스카의 매각을 애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알래스카를 미국에 파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최초의 인물은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 영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열렬한 러시아 애국자인 무라브요프–아무르스키 백작이었습니다. 그는 북태평양 전역에 러시아의 자원을 분산시키는 대신, 알래스카에서 러시아의 취약한 존재감을 줄이고, 러시아의 먹거리(breadbasket) 역할을 할 수 있는 남쪽으로의 팽창, 즉 극동지역으로의 확장에 집중함으로써 러시아 제국이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무라브요프–아무르스키 총독의 계획에 신뢰성을 더한 요소는 1860년대 러시아 제국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극동지역뿐만 아니라 면화의 원천인 중앙아시아로의 방향전환이었습니다. 사실, 러시아 제국은 북서 아메리카의 식민지에 대한 이해관계를 상실한 반면, 자신의 국경을 훨씬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867년(알래스카 판매의 해) 러시아 제국은 투르크메니스탄 총독부(Turkestan general-governorship)를 세우면서 중앙아시아 정복을 완성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고 주민이 거의 없는 러시아 -아메리카는 분명 제국의 보호를 받을만한 중요한 전략적 자산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래스카의 주요 자원으로 자주 인용되는 대형 금 매장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따라서 축소되는 제국의 영역에 대한 애국적 수사학의 여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러시아아메리카회사(RAC)가 특히 러시아의 농노제 폐지 이후 알렉산드르 2세와 그의 동생 콘스탄틴 대공이 주창한 근대화 계획에 맞지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했습니다. 콘스탄틴 대공에게 토착민과 혼혈인의 노예계약 노동을 이용하여 특별한 특권을 누린 독점기업으로서 러시아아메리카회사는 현대화를 방해하는 전근대적 관료주의 구조로 보였습니다. 콘스탄틴 대공은 이미 1857년 러시아-아메리카의 미국에의 양도를 추진했었습니다. 러시아 외상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에게 보낸 메모랜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기만해서도 안되며, 미국이 끊임없이 자신의 소유물을 늘려나가고 북미 전역을 완전하게 지배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식민지를 우리로부터 획득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해야만한다.” 콘스탄틴 대공의 이 제안은 1857년과 1858년에 걸쳐 러시아 정부의 상층부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틴의 편지를 본 알렉산드르 2세는 “이 생각은 가치가 있다.”라고 썼습니다. 북미에서 즉시 철수하겠다는 콘스탄틴의 제안을 지지하는 측은 뿌쨔찐 제독과 미국의 러시아 장관인 스테클을 포함했습니다. 고르차코프는 러시아-아메리카를 포기할 필요성에 동의했지만 그 판매까지의 점진적인 과정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해군장관과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AC)의 전임 최고관리자인 랑겔의 후원을 받았다. 랑겔은 캄차트카와 아무르 분지의 경제 발전에 투자하기 위해 알래스카 판매의 일부 수익금을 요청했습니다. 러시아의 황제는 마침내 고르차코프와 협의하여 러시아아메리카회사의 특허가 만료되는 1861년까지 협상을 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크림전쟁 패배 후의 황실의 재정적 위기와 해외 식민지, 특히 러시아-아메리카에서 영국과 미국의 전략적 위험에 노출된 당시 환경에서 영국이나 미국에게 빼앗기기보다 미국에 알래스카를 판매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비엔나체제 이후 세계 전역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해온 영국이 크림전쟁에 이어 북미 대륙에서 전쟁을 일으켜 러시아-아메리카를 포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항한 동맹으로서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미국에 알래스카를 파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에서 영국은 남부를 지지했고 러시아는 북부를 지지했었습니다. 지금 미러관계와 미영관계 생각하면 아주 격세지감이 느껴지실 겁니다. 마침내 1867년 3월 주미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트 스테클과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슈워드는 미화 720만 달러로 알래스카의 매매에 대해 합의했습니다. 알래스카 매매는 러시아와 미국의 알래스카 매매에 대한 조약이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인준과 더불어 미국 상원에 의해 인준되고, 미국 앤드류 존슨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국민들은 판매 이유와 낮은 가격에 의문을 표했고, 미국인들도 왜 필요 없는 동토를 구매했는지 의문을 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래스카의 원주민들인 인디언, 알류트족, 에스키모족들도 이 거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알래스카 매매 협상을 진행한 윌리엄 슈워드 당시 미 국무장관은 알래스카 판매협약에 서명했고, 그것에 대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거래를 “슈워드의 어리석은 행동(Seward’s Folly)”, "슈어드의 아이스박스(Seward’s icebox)"로 비난했습니다. 판매협상을 승인한 상원의원들 사이에는 그가 러시아 대사에게 매수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상원은 단 한 표 차이로 알래스카 매입 조약을 비준했습니다. 3. 알래스카 판매, 장기적으로는 미국에 큰 이득이 되다 알래스카 매입이 있은 지 30년 후인 1897년 금광이 잇따라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 석탄까지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로서 미국은 막대한 지하자원을 얻었다. 더군다나, 알래스카에 매장이 되어있는 석탄의 양은 전세계 1위였습니다. 알래스카에는 위에서 세번 째 기사에 따르면 2007년 기준 미국 전체 석유.석탄 매장량의 50%, 주석 매장량의 80%, 니켈 매장량의 20%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석유만 보면 확인 매장량만 45억 배럴에 이른데 여기에 위에서 첫번 째 기사에 거대 유전이 추가로 발견되었습니다.알래스카 매입이 있고서 80년 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과 소련이 냉전으로 대립을 하게 되면서 군사적, 지정학적으로 가치가 더욱 상승했습니다. 미국은 알래스카를 군사 기지로 삼아서 냉전 시대에 소련의 아메리카 진출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육군 중심이던 소련은 해군, 공군력이 상대적으로 자신들보다 우위였던 미국과 태평양, 북극해, 대서양으로 떨어져 있어서 미소전쟁 발발하면 어느 정도의 불리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만회하고자 쿠바에 미사일 기지도 설치할려 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만약 알래스카가 소련의 영토였다면 소련은 미국 및 캐나다 본토에 육군을 전개하여 지상전을 벌일 수 있는 우위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위에 마지막 사진에서 보듯이 쿠바가 아닌 소련의 영토인 알래스카에 미사일 기지를 배치한다면 미국으로서도 막을 명분도 전혀 없기에 냉전시기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역이 되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