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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명훈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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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전문가
EBS
Q.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전투를 패배한 이유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의 3만 병력에 백제가 이토록 무참히 짓밟힌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개로왕의 내정의 실패였다.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시도해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었다.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 가운데에는 그의 두 아들 여도(餘都 : 뒤의 문주왕)와 여곤(餘昆 : 문주왕의 아우이자 동성왕의 아버지인 昆支로 추정됨)을 비롯해 8명이 왕족인 여씨(餘氏)였고, 당시 백제의 주요 세력이었던 해씨(解氏)나 진씨(眞氏)는 없었다. 또한 문주왕은 왕자로서 백제의 최고 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대 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개로왕이 왕궁을 장려하게 짓는 등 큰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도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구래의 대 귀족세력들이 그대로 존속하는 가운데 그들을 배제시킨 채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한 것은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와해시키고, 백제 왕실의 영도력 자체도 약화시켰다. 개로왕은 백제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망명해 고구려군의 선봉장이 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그리고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즉위하자 구래의 대귀족인 해구(解仇)의 반란이 있었다.이는 개로왕의 왕족 중심 정권 운영이 백제 지배층 내에 왕실에 대한 적대세력을 키워냈고, 그로 인해 지배층의 내분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리한 왕궁 건축 등을 강행해 하층민을 위시한 국민들은 왕실에 대한 원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도미전(都彌傳)의 개루왕은 고구려영토와의 위치로 보아 근개루왕, 즉 개로왕으로 보이는데, 이 전설에서 왕은 잔인하게 하층민의 아내를 빼앗으려 한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개로왕이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하고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개로왕이 널리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장지는 미상이다.
Q.  당태종 이세민이 안시성 양만춘에게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안시성의 고구려군은 당태종의 깃발과 수레의 덮개 등을 발견하는 즉즉 성루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면서 황제를 도발했다. 태종이 화를 내자 이세적은 "성을 함락시키는 날 저들을 모두 묻어버리게 해주십시오." 라고 청했다. 이 소식이 성 내부에까지 들려오자 안시성 군사들은 이미 배수진을 쳤다고 생각, 더욱 굳게 지키기를 각오했다.이후 여러 차례 공습이 시도되었으나 당군은 번번이 성벽을 넘는 데 실패했다. 이내 전투가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당태종을 포함한 당군 수뇌부는 고뇌에 빠졌다. 이때 주필산 전투에서 패전한 고구려 항장, 고연수와 고혜진이 안시성은 포기하고 오골성의 성주는 늙어서 공격하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니 오골성을 함락시킨 다음에 바로 평양성을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놨다.하지만 당태종의 오른팔과 같았던 장손무기가 나서서 "천자께서 직접 하시는 정벌인데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됩니다. 지금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돌리면 분명 100,000명의 적군이 우리 뒤를 칠 것입니다. 안시성과 건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합니다."라며 반발하자 안시성 공략을 계속하기로 결정이 났다.이후 안시성을 포위한 당군과 수성 중인 고구려군 사이에는 산발적 교전이 몇 주간이나 이어졌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들려오는 닭과 돼지 소리를 듣고,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면서 성 안의 연기가 미미해졌지만, 지금 닭과 돼지가 시끄러운 것은 군사들에게 잡아먹히고 밤 중에 나와서 기습할 것이기 때문이다."라 여기면서 이세적에게 대비하도록 했다. 그 뒤 정말로 밤에 수백 명의 고구려군이 성벽에 줄을 매달아 내려왔고, 이 소식을 들은 당태종이 성 아래로 군사를 불러 공격해 수십 명을 죽이고 물러나도록 했다.전투 말기, 이도종이 무리를 감독해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토산을 쌓고 안시성을 압박했는데, 안시성에도 이에 대응해 성을 더 높이 증축했고, 여러 차례 군사들이 교대로 싸워 하루에도 6번에서 7번 교전할 정도였다. 당군이 충차와 포석으로 성벽을 부수자 안시성은 목책으로 부서진 부분을 수리했으며, 이도종이 싸우다가 부상당했고 당태종 자신도 다치는 등 사상자가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토산을 완성하는 데 2개월이나 걸렸다. 당시 당군은 토산을 쌓는 데만 연인원 500,000명을 동원했다고 한다.우여곡절 끝에 토산이 완성되고, 꼭대기에서 성곽까지는 몇 장 정도 떨어져 있어 내려가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이도종은 부복애를 시켜 토산 꼭대기에서 대비하게 했지만,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거느리고 떠나고 있던 중에 고구려의 정예군 수백 명이 부서진 틈을 통해 기습에 성공,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면서 참호를 파고 지켰다. 결국 당태종은 화가 나서 부복애를 참수하고, 조리돌렸으며, 이도종 또한 죄를 청했으나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한 공로가 있어 용서했다.요동성이 일찍 추워지며, 풀은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지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태종은 철수했다. 이때 당군의 퇴각 루트가 안시성에서 철수해서 요하 하류의 요택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기록에는 요택이 진흙창이라 겨울철에 병사들이 건너는데 몹시 고생해 태종 자신까지 나서서 병사들과 함께 수레를 밀어야 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9]태종 이세민이 최후의 자존심 때문에, 성주에게 성을 잘 지켰다는 공으로 비단을 하사하고, 품위를 지키며 퇴각하려 한 기록이 남아 있다.당나라는 안시성의 대패로 인해 고구려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으며, 당의 주력군이 고구려 원정을 한 틈을 타서 튀르크계 설연타(쉬르-타르두쉬)의 힐리구리실설사다미가한이 하주를 노략질했다.[10] 이로 인해 태종 이세민은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주를 직접 정벌하려다가 병에 걸리게 되었다.그리고 이세민은 자신이 제1차 고당전쟁에서 고난을 겪었던 사실들 및 철수하는 과정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추격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예 빼 버리고 자기 입맞에 맞게 역사서를 기록했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진서》에는 고구려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다.안시성 전투는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로서 대미를 장식했으며, 당태종과 당나라의 주력군이 패배함에 따라, 안시성 전투는 이후에도 동아시아에서 강력하게 각인이 되었다. 당태종은 안시성의 참패 후, 수양제 양광이 행한 당장의 무리한 대규모 원정보다는 장기적으로 대규모의 원정을 준비하면서 고구려와는 계속하여 소모전 및 유격전을 치르고, 신라와는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때문에 안시성 전투는 이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역사에서 큰 분기점이 되는 역사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기도 하다.
Q.  신라는 언제부터 불교를 공인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정도 늦은 법흥왕 528년 때 공인이 되었습니다.
Q.  신라의 화백회의는 언제부터 생겨서 운영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법흥왕 시기 상대등을 설치하고 왕은 직접 회의에 참석하지 않게 된 이후부터 알맞은 명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 시기에는 별다른 명칭으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Q.  석고대죄는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문화였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와 대치 상황에 있던 중, 진나라의 승상 범수(范睢)는 과거 죽을 처지에 놓였던 자신을 구해준 적이 있는 정안평(鄭安平)을 추천하여 조나라를 공격하러 보냈다. 그런데 정안평은 조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전세가 위급해지자 병사 2만 명을 데리고 조나라에 투항해버렸다. 이 일로 범수는 멍석을 깔고 앉아 벌받기를 기다렸다[席稿請罪].진나라의 법에 따르면,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가 죄를 범하면 추천한 사람도 같은 벌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에 따라 범수는 삼족을 벌해야 마땅했으나, 왕은 범수를 매우 신임하여 오히려 이 일을 함부로 발설하는 자를 정안평과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고 하며 범수를 다독였다.석고대죄를 할 때는 관과 의복을 벗은 소복 차림으로 거적때기를 깐 바닥에 꿇어앉는다. 당시 의관은 양반에게는 기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차림은 현대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싸구려 돗자리를 깔고 팬티와 런닝셔츠만 걸치고 꿇어앉아 있는 꼴'이 되는 정도로 수치스러운 모습이다.즉, 이 자체가 큰 처벌. 또한 벌을 청하며 '기다리는' 것이므로 벌을 내릴 사람이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계속 죄를 청하며 며칠 동안 바닥에 앉아있어야 한다.사실 '이러이러한 벌을 내려주십시오'라고 빌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제가 이렇게 볼품없는 차림으로 죄를 청하고 있으니 그만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의 의미에 가까웠다. 자신을 상대에게 한없이 낮추어 상대로 하여금 주장을 꺾게 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게 하려는 퍼포먼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관용적인 표현으로 상소문 등에서 신하가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 "석고대죄할 뿐입니다." "석고대죄하면서 기다립니다." 등으로 쓴다.사극에서는 자주 나오지만, 석고대죄를 했다는 기록은 그리 많지는 않다. 석고대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위 관료 혹은 왕족들 정도나 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석고대죄라는 극단적 방법까지 동원할 만큼 어떤 정치 문제가 크게 확대되는 일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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