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미메시스'는 어떤 의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모방이라는 뜻. 플라톤은 감성계의 개별적 사물은 참된 실재인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하고 이데아보다 낮은 차원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예술도 모방으로 이해하여 이데아의 영상이라고 하고 감성계의 모방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 예술을 멸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예술을 모방이라고 하였지만, 언어, 리듬 등을 매개로 하여 모방을 하는 예술(서사시, 서정시, 비극, 희극, 무용, 음악 등)은 '성격이나 정서나 행위', 요컨대 인간의 마음의 내부를 모방하는 것이고, 개별적인 사태를 재현하는 경우에도 역사와는 달리 '개연적으로든지 필연적으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사태'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개별성은 보편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예술의 멸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모방하는 것과 모방된 것을 즐거워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갖춰져 있는 것이라고 하여 여기에서 예술의 유래를 구하였다.
Q. 신라시대 6두품은 어떤 신분이었는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6두품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다음의 높은 계급으로, 차지하기가 힘들다는 뜻에서 일명 ‘득난(得難)’이라고도 하였다.신라사회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하면서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것은 골제와 두품제로 편제되어 있는데, 6두품은 두품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계급이다. 골품제에 편입되는 자는 왕경인(王京人)에 한했고, 중앙관직에 임명되므로 지배집단에 속했다. 6두품은 최고의 신분층은 아니었지만 중앙귀족이었다.신라귀족은 골품에 따라 관직에 오를 수 있는 등위가 결정되어 있고, 타는 수레나 사용하는 기물·복색·거주하는 집의 크기에 제한을 받았다.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오를 수 있었고, 아찬에서 더 관등을 올려야 할 경우 중위제(重位制)를 적용해 중아찬(重阿飡)에서 4중아찬(四重阿飡)까지를 제수하며,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으로 올리지 않았다. 834년(흥덕왕 9)에 반포된 규정은 비록 진골과 6두품 신분을 구별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지만, 5두품이나 4두품에 비해 6두품에 대한 제한규정이 훨씬 적은 편이다.6두품에 속한 중요한 가문으로는 우선 설씨(薛氏)를 들 수 있다. 설씨는 원효(元曉)가 속한 가문으로, 본래는 압독국(押督國)의 왕족이었다. 가야가 멸망한 뒤 왕족은 진골로 편입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왕족이나 최고귀족은 6두품으로 편입되었다. 강수(强首)가 곧 이러한 사례에 해당된다.고구려와 백제의 귀족 역시 멸망 후 일부가 골품제로 편입되었고, 신분이 높은 귀족은 6두품으로 편제되었다.그 밖에 이순(李純)·이순행(李順行)·이정언(李正言) 등의 이씨 가문, 신라 하대 최치원(崔致遠)으로 대표되는 최씨 가문이 6두품에 속하였다. 곧, 6부(部)의 6성(姓)이 6두품의 대표적 가문이다.사로부족(斯盧部族)을 이루고 있던 부족장 가족이 왕족인 진골 바로 밑의 신분층으로 형성될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졌다. 이들이 일단 6두품 신분으로 성립되고 난 뒤, 사로국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병합된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지배자나 귀족국가의 상류귀족이 6두품으로 편입되어갔다.6두품 가문 중에 김씨(金氏)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김지성(金志誠)이 곧 6두품이다. 그가 본래 왕족인 김씨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라 하대가 되면 진골에서 강등해 6두품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한 낭혜선사(郎慧禪師)가 강등된 6두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