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고대죄는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문화였나요?
과거에 행해졌던 석고대죄는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문화였나요?
아니면 다른 나라의 방법을 도입해 사용한 것인지? 석고대죄의 유래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석고대죄는 중국의 전국시대에 일어난 사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왕이나 왕비 등 왕실 가족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석고대죄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석고대죄'는 한국의 고유한 문화는 아니며, 한자문화권에서 널리 쓰이는 사죄 방식 중 하나입니다.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석고대죄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와 대치 상황에 있던 중, 진나라의 승상 범수(范睢)는 과거 죽을 처지에 놓였던 자신을 구해준 적이 있는 정안평(鄭安平)을 추천하여 조나라를 공격하러 보냈다. 그런데 정안평은 조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전세가 위급해지자 병사 2만 명을 데리고 조나라에 투항해버렸다. 이 일로 범수는 멍석을 깔고 앉아 벌받기를 기다렸던 것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와 대치 상황에 있던 중, 진나라의 승상 범수(范睢)는 과거 죽을 처지에 놓였던 자신을 구해준 적이 있는 정안평(鄭安平)을 추천하여 조나라를 공격하러 보냈다. 그런데 정안평은 조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전세가 위급해지자 병사 2만 명을 데리고 조나라에 투항해버렸다. 이 일로 범수는 멍석을 깔고 앉아 벌받기를 기다렸다[席稿請罪].
진나라의 법에 따르면,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가 죄를 범하면 추천한 사람도 같은 벌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에 따라 범수는 삼족을 벌해야 마땅했으나, 왕은 범수를 매우 신임하여 오히려 이 일을 함부로 발설하는 자를 정안평과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고 하며 범수를 다독였다.석고대죄를 할 때는 관과 의복을 벗은 소복 차림으로 거적때기를 깐 바닥에 꿇어앉는다. 당시 의관은 양반에게는 기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차림은 현대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싸구려 돗자리를 깔고 팬티와 런닝셔츠만 걸치고 꿇어앉아 있는 꼴'이 되는 정도로 수치스러운 모습이다.
즉, 이 자체가 큰 처벌. 또한 벌을 청하며 '기다리는' 것이므로 벌을 내릴 사람이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계속 죄를 청하며 며칠 동안 바닥에 앉아있어야 한다.
사실 '이러이러한 벌을 내려주십시오'라고 빌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제가 이렇게 볼품없는 차림으로 죄를 청하고 있으니 그만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의 의미에 가까웠다. 자신을 상대에게 한없이 낮추어 상대로 하여금 주장을 꺾게 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게 하려는 퍼포먼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관용적인 표현으로 상소문 등에서 신하가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 "석고대죄할 뿐입니다." "석고대죄하면서 기다립니다." 등으로 쓴다.
사극에서는 자주 나오지만, 석고대죄를 했다는 기록은 그리 많지는 않다. 석고대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위 관료 혹은 왕족들 정도나 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석고대죄라는 극단적 방법까지 동원할 만큼 어떤 정치 문제가 크게 확대되는 일이 적었다.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석고대죄는 기원전 3세기 중국의 진나라의 승상 범수가 자신이 잘못 천거한 장안평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의 죄에 대한 처분을 기다렸던 데에서 유래되었고 그것이 조선 시대를 거쳐 한국에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