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견훤은 건국 후 어디와 활발한외교활동을 하였는가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견훤은 나라를 세운 바로 그 해에 중국의 오월과 왜에 사신을 파견하며, 후삼국 중에서도 국제 외교에 가장 신경을 기울였습니다. 견훤은 오월에 사신을 보내고 책봉을 받았는데, 망해가던 당에게 책봉받았던 신라나(이후 생긴 후당은 좀 멀쩡하긴 했다.) 중국과의 조공-책봉 관계는 아오안이던 후고구려와 고려, 발해에 비해서 중국 내에서 정통성은 후백제 쪽이 더 높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게다가 오월국이 연호를 제정하고 독립국화했으면서도 오대 제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음을 생각하면, 견훤이 "내 등뒤에 중국 황제 있다"라는 말이 100% 거짓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Q. 송유진의 난은 무엇을 말하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송유진은 당초 선조 27년(1954) 정월 대보름에 일당을 이끌고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충청도 일대를 주무대로 한 이 반란음모는 본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다른 지역에까지도 상당한 동조세력을 갖고 있었다.반란이 발각되기 전에 송유진 일당의 포진상황을 보면 1진은 청계산에, 1진은 지리산에, 1진은 속리산에, 1진은 광덕산에 포진하는 등 여러 산골짜기에 분포된 자가 2천여 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술은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여러 지역에 그들의 동조자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송유진과 같이 거사를 계획하다가 배반하여 그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던 홍우는 선조의 문초에서 "유진의 흉칙한 정상으로는 그 군사가 10명이면 1백명이라 하고, 1백 명이면 1천명이라고 일컫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방관들의 보고 내용을 보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세력들이 서로 연계되기 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충청도 조도어사 강첨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반란군들 중에는 양반과 무관들도 섞여 있었으며, 이들이 반란에 주도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천안에서는 무기를 관리하던 관원이 송유진 일당에 사로잡히기도 하였고, 본 고을 사람 중에서도 자진하여 적중에 들어가는 자도 있었다. 중앙 정부는 천안의 군기감관 송망기 등이 반군에게 사로잡힌 사건을 중시하여, 선전관을 급히 파견하여 송망기의 거처를 탐지하는 한편, 병사 변양준과 순변사 이일 등에 명하여 비밀리에 탐문토록 하였다.송유진은 충청도 천안과 직산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울의 수비가 허술함을 알았고, 의병장을 사칭하여 반란세력을 규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때 지리산, 속리산, 청계산 등지에 은신하고 있는 그들 일당의 수가 2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군량미와 무기를 수집하여 양을 많이 비축하였다. 그들은 먼저 각처의 반란세력과 약속하고 군사를 움직여 아산, 평택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명기를 탈취하였고, 그 뒤 서울에 침입하기 위해 언제 먼저 전주에 밀서를 보내 국가 전복을 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