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려시대 경제정책중 수취제도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고려는 신라 말의 문란한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습니다. 고려는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호구를 조사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과 호구 장부인 호적을 작성하였고,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습니니다.조세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습니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이었습니다. 거둔 조세는 각 군현의 농민을 동원하여 조창까지 옮긴 다음, 조운을 통해 개경으로 운반하여 보관하였습니다.공물은 집집마다 토산물을 거두는 제도입니다.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나누어 주현에 부과하면, 주현은 속현과 향, 부곡, 소에 이를 할당하고, 각 고을에서는 향리들이 집집마다 공물을 거두었습니다. 공물의 종류로는 매년 내어야 하는 상공과 필요에 따라 수시로 거두는 별공이 있었습니다.역은 국가에서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제도로,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정남이라 하여 의무를 지게 하였습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 밖에, 어민에게 어염세를 거두거나 상인에게 상세를 거두어 재정에 사용하였습니다.
Q. 고대 삼국시대 교육 방법이 궁금합니다. 고구려 태학과 경당, 백제 5경 박사, 신라 임신서기석과 통일 신라 독서삼품과 등이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고구려의 태학은 소수림왕 2년(372)에 설립되었으며 기록상 한국 최초의 학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학은 명칭으로 볼 때 중국 동진의 학교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동진에서는 일찍이 태학을 운영하고 있었고, 또한 동진과 고구려가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구려의 태학은 동진의 것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동진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태학의 입학 대상 역시 귀족층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태학은 관료양성기관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구려의 경당은 지방에 설립된 학교로서 고구려의 곳곳에 경당이 존재하였습니다.백제에는 교육기관과 관련하여 ‘박사’라는 호칭이 있었습니다. 박사는 원래 중국에서 유교경전의 연구와 교육을 담당했던 학관(學官)의 일종인데, 학관이 있었다는 것은 곧 교육기관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