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1922년 제2차 교육령이 개정되고 민립대학의 길이 마련되었는데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1922년에 일제가 제 2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하여 조선인의 대학 교육 가능성이 조금 열린 것에 대한 자극으로, 조선 교육 협회가 주도하여 그해 6월에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이상재가 중심이 되어 조선 교육회를 모체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속에서 조직되었습니다.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3일간에 걸친 총회를 개최하게됩니다.이때 발기 취지서를 내면서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는데, 자본금 1,000만원을 3년만에 모아 법과, 경제과, 문과, 이과, 공과, 의과 등 순서대로 개설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교육회부터 갖춘 치밀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국내외 대규모의 모금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관동대지진, 홍수, 가뭄 등의 재앙으로 모금이 어려워졌고, 일제의 잦은 방해로 인해 계획한만큼 모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1924년에 설립하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Q. 미쓰야 협정의 어떤 내용들 때문에 만주의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미쓰야 협정은 1925년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와 중화민국 둥베이(만주)의 군벌 장쭤린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협약입니다. 만주 각지에 있던 한국독립군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일본제국은 대륙 침략 정책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으므로 한국독립군 단속과 체포에 관한 교섭을 추진하게됩니다. 이 비밀 협약은 1925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가 만주군벌 세력의 장작림과 만주 지역 독립군의 활동을 탄압한다는내용을 골자로 맺었으며, '한국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면 반드시 일본 영사관에 인계할 것과 인계받은 대가로 포상금을 지불하되 그 일부는 체포한 관리에게 줄 것'을 규정한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 협정으로 인해 만주군벌 세력들 및 관리들은 한국독립군 적발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무고한 농민까지도 많은 피해를 입게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협약으로 인하여 만주 내 항일 독립운동이 크게 탄압되어 위축되었습니다.
Q. 윤동주와 송몽규는 왜 생체실험 대상이 됐나요?
안녕하세요. 1980년 일본인 한국유학생 고노오 에이치는 잡지 ‘현대문학(10월호)’에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으로 징발되어 생리식염수 주사를 맞고 사망했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고노오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두 가지 내용을 들었습니다. 첫째 ‘45년 2월16일 동주 사망’이란 전보가 가족들에게 배달된 뒤 10일 뒤에 ‘시체를 찾아가지 않으면 규슈제대(九州帝大) 해부용으로 제공함’이라는 또다른 전보가 날아왔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감방에서 함께 지냈던 송몽규가, 윤동주의 시신을 찾으러간 부친에게 “매일처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느라 피골이 상접해 간다”란 말을 했고, 한달도 안된 3월10일에 그 또한 사망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