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트리나 2세는 러시아 출신이 아닌데 러시아 여제가 되었나요?
예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러시아 여제가 된거에요? 서양은 황후도 계승권 있었던건가요? 역사 고수님들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러시아의 여황제. 스스로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올라 대제라 불렀다.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함과 동시에 귀족들과 협력체제를 강화하였으며 영토를 크게 확대하고 농노제를 확장하였다.
프로이센 슈체친 출생. 독일의 작은 공가(公家)에서 태어났다. 1745년, 후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3세에게 출가한 뒤 남편의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즉위한 지 얼마 안되는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대제(大帝)라 불렀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유하였고, 학예와 교육에 큰 관심을 쏟았다. 특히, 1767년에 소집한 사회 각층의 대표로 이루어진 법전(法典)편찬위원회에 새로운 정치원리를 해설하는 유명한 훈시를 함으로써 계몽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 법전의 편찬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1773년에 일어난 푸가초프의 반란 이후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1775년의 지방행정 개혁, 1785년의 귀족 특권 인가장 등으로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함과 동시에 귀족들과의 협력체제도 강화하였다. 만년(晩年) 특히 프랑스혁명 발발 뒤에는 반동화하여 자유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외정(外政)면에서는 두 차례의 투르크와의 전쟁(러시아-투르크 전쟁)과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 등으로 러시아의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대하였다. 아들 파페르와 불화가 심한 반면, 손자 알렉산드르를 편애하여 자유주의 교육을 시켰으며, 음탕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보냈다. 가까운 여러 총신에게 국유지와 농민을 덧붙여 하사함으로써 농노제(農奴制)를 확장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예카테리나 2세 [Ekaterina II]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가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표토르 3세가 펼친 대내외 정책은 제국의 군부와 교회를 비롯해 지배 계층의 불만을 불렀고 그의 비판 세력은 황제가 무지몽매하고 러시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며 통치 능력이 전혀 없다고 비판합니다.
반면에 예카테리나는 지혜롭고 박식하며 신앙이 깊으나 남편에게 박해받는 착한 아내로 추앙되며 남편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훼손되고 황제에대한 근위대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하자 예카케리나는 최측근들과 함께 반란을 획책하며 오를로프 형제, 포툠킨 , 표도르 히트로보 등 반란의 주모자들은 근위대들을 선동해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1762년 6월 28일 표토르 3세가 페테르부르크 근교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음모는 실행에 옮겨지고 수도에서 예카테리나에 대한 충성 서약이 진행, 오를로프 형제가 이끈 근위부대는 표토르 3세를 체포, 정교 탄압과 프로이센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이유로 표트르 3세에 대한 폐위가 공포됩니다.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퇴위시킨 예카테리나는 제국의 여제로 등극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차리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반란에 성공한 이유는 그녀는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임을 만천하에 알렸다고 합니다. 표트르 3세는 체포되어 8일 후에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