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양화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양화대교와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조선시대 기록에 의하면 양화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어서 경치가 아름다워 상당히 유명했다고 들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현재 양화대교가 존재하는데요 양화진과 양화대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양화대교와 양화진은 말에서 보이 듯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양화진은 한강의 중요한 나루터로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수로의 입구에 위치했으며, 외국과의 무역과 왕실의 행차에 필요한 배들이 정박하고 출입했다고 합니다.
현재 양화대교는 양화진 나루터의 바로 위에 건설되었습니다. 1986년에 개통된 양화대교는 서울의 서남부와 동북부를 잇는 중요 다리로 양화진 나루터와 양화대교를 통해 한강의 변천사를 알 수 있습니다.
제 답변이 질문자님께 도움이 되셨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화대교의 이름의 어원은 과거 이 다리 인근에 있던 한강의 주요 나루터인 양화진에서 따온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삼진의 하나였으며 양화도라고도 하며
과거 교통 ,경제,군사상 중요한 기능을 차지하였던 양화진 지역은 현제 양화대교가 가설되고 강변도로와 지하철2호선이 설치되어 있어 여전히 교통상 중요 지역의 하나이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화대교 북단에 있던 나루터로서, 한강도와 아울러 고려 때부터 중요한 도선장의 하나였으며 조선 초에 이미 도승이 배치되었다. 양천을 거쳐 강화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강화가 교통 · 관방상으로 중요시되던 당시에 있어서 그 비중은 매우 컸다. 양화도에서 보유한 진선은 10척 내외의 관선과 이와 별도로 사선의 나룻배도 있었다. 연산군 때는 노량도 외의 모든 진도를 금하고 진선은 모두 동원되어 국왕의 뱃놀이에 사용되어 양화도 역시 쇠퇴하였다.
중종 초기의 기록에 의하면 나루를 건너고자 하는 사람은 많고 진선은 단지 2척뿐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먼저 건너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갖고 한꺼번에 승선하기 때문에 자주 침몰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어영청으로 하여금 이곳에 별장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때 양화진에 비치된 진선은 9척이었다. 양화진 별장은 인근의 공암진 · 철곶진까지 관장하였다. 양화도 일대 역시 경치가 좋아서 중국의 사신이 오면 종종 이곳에서 선유를 베풀었으며, 사대부들의 별장도 많았다고 한다.
출처 : 서울지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