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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종파 사건이 무슨사건인가요?

안녕하세요.


'8월 종파 사건'이라고 하는 사건은 무슨 사건인가요?


어디에서 언제쯤 일어난 사건이며


사건의 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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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6년 8월 북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어진 계파 간의 정치 갈등을 가리킨다.

    8월 종파 사건은 1956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金日成)의 반대 세력인 소련파, 연안파가 김일성의 당 독재와 개인숭배를 비판한 정치 갈등을 말한다.

    1953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이 사망하고, 1956년 2월 14~25일에 개최된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을 향한 개인숭배가 비판받았다. 이 여파는 북한에도 밀어닥쳤는데, 북한도 김일성 독재체제가 아니라 집단적 지도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김일성은 조선노동당에서의 개인숭배는 박헌영(朴憲永)에게만 행해지고 있다며 회피하려 했지만, 소련은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고 1956년 4월 23일~29일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3회 대회에서 집체적 영도(領導)의 레닌적 원칙의 완전한 수립을 요구했다. 결국 김일성은 소련의 제안에 따라 인사를 개편했다.

    한편 6·25전쟁이 정전된 후, 북한이 해결해야 할 주요 과업 중 하나는 전후 복구였다. 전쟁으로 각종 사회간접자본과 공장, 농장 등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북한은 1957년부터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의 시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게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1956년 6월 1일부터 소련 및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차례로 방문했다. 공산국가들에게 자본과 기술을 지원받기 위함이었다.

    김일성이 소련 일대로 장기 순방을 떠나자, 북한 내에서는 김일성을 향한 개인숭배를 비판하여 그를 끌어 내리려는 시도가 발생했다. 소련의 개인숭배 비판에 힘을 얻은 것이었다. 연안파(延安派)의 김두봉(金枓奉), 최창익(崔昌益), 윤공흠(尹公欽), 이상조(李相朝) 등과 소련파(蘇聯派)의 박창옥(朴昌玉), 김승화(金承化) 등이 주축이 되었고, 주 평양 소련대사관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접촉하여 북한의 정치 상황과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했다. 김일성이 귀국한 7월에도 연안파와 소련파의 공격은 지속되었다.

    양측의 갈등은 1956년 8월 30~31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격화되었다. 본래는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을 다녀온 김일성과 대표단이 보고회를 주관하고 이후 기타 안건에 관해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토론자였던 연안파의 윤공흠이 김일성의 독재체제와 지도부를 공격한 것이다. 윤공흠은 레닌적 원칙인 집체적 영도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중앙위원회 위원의 대부분은 김일성을 지지했고, 연안파와 소련파의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형세가 이렇게 되자 윤공흠 등은 중국으로 망명했고, 최창익, 박창옥 등이 남아 논의를 이어가려 했지만 모두 해임 및 출당되었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중국과 소련에 의지해 사태를 반전시키고자 했다. 이에 중국과 소련이 북한에 대표단을 파견해 해임 및 출당당한 인물들의 회복을 요구했다. 김일성은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고, 1956년 9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와 소련파의 제명 취소를 결의했다. 그러나 1957년 북한은 최창익, 박창옥 등을 국가반란음모죄라는 명목으로 숙청했고, 김두봉 등 나머지 인물들은 정치적으로 좌천되었다. 김일성이 자신의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상황에서 중국과 소련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56년 10월 공산국가였던 헝가리에서 민주화운동이 발생했고, 1957년에는 중국과 소련이 갈등이 심해져 양국이 북한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8월 종파사건은 연안파·소련파의 패배로 끝이 났고, 김일성의 독재체제는 더욱 공고해지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8월 종파 사건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8월 종파사건은 1956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반대 세력인 소련파, 연안파가 김일성의 당 독재와 개인숭배를 비판한 정치 갈등입니다.

    1953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2월 14~25일 개최된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을 향한 개인 숭배가 비판받았는데 이 여파는 북한에도 밀어닥쳐 북한도 김일성 독재체제가 아니라 집단적 지도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김일성은 조선노동당에서의 개인숭배는 박헌영에게만 행해지고 있다며 회피하려 했지만 소련은 그의 주장을 믿지않았고 1956년 4월 23~29일 열린 조선노동당 제3회 대회에서 집체적 영도의 레닌적 원칙의 완전한 수립을 요구, 결국 김일성은 소련의 제안에 따라 인사를 개편합니다.

    한편 6.25전쟁이 정전된 후 북한이 해결해야 할 것은 전후 복구로, 전쟁으로 각종 사회간접자본과 공장, 농장 등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으로 북한은 1957년부터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의 시행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게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형편이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김일성은 1956년 6월 1일부터 소련 및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차례로 방문, 공산국가들에게 자본과 기술을 지원받으려 했습니다.

    김일성이 소련 일대로 장기 순방을 떠나자 북한 내에서 김일성을 향한 개인숭배를 비판하여 그를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발생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8월 종파 사건 또는 8월 숙청 사건이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956년 6월부터 8월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이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발표된 '반당 반혁명적 종파음모책동'사건을 일컫는다. 종파는 북한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따르지 않는 세력을 비난조로 일컫는 말이다.

    -출처: 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8월종파사건이란

    6.25전쟁을 휴전(1953.7.27) 한 후 1956.8월에 북한의 김일성은 본인의 일인 독재체를 비난 하거나 반대하는 세력들인 최창익,박창욱등의 연안파와 쏘련파에 속한 사람들을 투옥,연금,가혹한 숙청을 한 사건을 말합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8월 종파 사건은 1956년 8월 북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어진 계파 간의 정치 갈등을 일컫습니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반대 세력인 소련과, 연안파가 김일성의 당 독재와 개인숭배를 비판한 정치 갈등을 말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8월 종파사건’이란 북한 내 연안파와 소련파 계열 세력들이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개최를 계기로 김일성 중심의 정치세력을 당에서 축출하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주도자들이 체포된 사건을 말합니다. 김일성은 이 사건을 주동하였던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고,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1인 지배의 독재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1950년대 북한은 내부적으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습니다. 북한 지도부 내의 권력투쟁은 전후 복구건설 노선과 사회주의 개조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면서 전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김일성 중심의 핵심지도부는 ‘중공업 우선의 경공업, 농업의 동시발전’과 농업협동화를 제시하였고, 최창익, 박창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은 경공업과 농업 우선의 발전을 주장하면서 대립하였습니다.


    당시 반대파는 연안파와 소련파 계열이었으며 권력의 핵심에서 점차 소외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초기의 연안파와 소련파의 반대 움직임은 북한 경제재건의 발전방향을 둘러싸고 김일성의 노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개최된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의 스탈린 우상화 비판의 영향을 받아 김일성의 권력독점과 개인숭배 등을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전면적인 반김일성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소련, 중국과 연계된 정치세력들로 소련의 스탈린 우상화 비판을 계기로 권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섰지만 김일성 중심의 정치세력을 꺾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오히려 김일성은 반대파에 대해 소련의 지도노선을 추종하는 교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강하게 비판하면서 본인의 세력을 확대하고 반대파의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8월 숙청 사건이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956년 6월부터 8월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발표된 '반당 반혁명적 종파음모책동'사건을 일컫는데요. 종파는 북한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따르지 않는 세력을 비난조로 일컫는 말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인민주의 공화국은 1956년대 말 최창익 일파 및 연안파 세력을 투옥, 연금함으로써 김일성 자신의 정적들을 가혹하게 숙청하고 정치 지도부를 단일화, 김일성 자신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선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무 위키에는

    1956년 8월 30일에 발생한 소련파연안파김일성만주파에 대한 축출 시도.

    1956년 8월 30일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기 제2차 전원회의가 열린 날인데, 이날 최창익, 박창옥, 서휘, 윤공흠, 리필규 등이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을 시도했으나 곧바로 김일성의 친위세력들에 의해서 진압됐고 그 이후 숙청되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조선로동당이 일당독재 정당에서 일인 독재 정권의 도구'로, '북한이 일당제 인민민주주의의 공화국에서 수령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전체주의 독재 국가로 바뀌게 된 단초가 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8월 종파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북한 정권, 정확히는 김일성 입장에서 볼 때 8월에 종파분자들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자료 부족으로 인해 북한의 공식 설명에 의존했던 결과이며 1990년대부터 백준기 교수를 시작으로 더 중립적인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최신 논문들은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많이 부른다.

    북한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공개적으로 김일성을 비판하고 김일성의 권력에 도전했던 사건이다. 북한 내부에서 알려지지 않은 쿠데타 시도 등이 더 있었을 수도 있지만 공식적인 회의에서 김일성에게 도전했던 사건은 이 사건이 유일하다.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출처 : 나무위키 https://namu.wiki/w/8%EC%9B%94%20%EC%A2%85%ED%8C%8C%EC%82%AC%EA%B1%B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