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우제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기우제를 지냈다고하는데 정작 어떠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네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우제의 형식과 과정을 알고싶고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이 있는지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고려 시대 기우제는 왕이 곧 용의 자손이라 칭하고 호국신으로서 용을 숭상하였기에 비를 내리도록 무당의 춤과 음악을 통해 기원했다면, 조선 왕조 때는 용이 비를 내리도록 강요하고 놀리는 조롱하는 의도가 다분했다는 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에도 기우제에는 국왕 이하 사람들이 근신하고, 천지 · 산천 · 종묘 · 부처 · 용신에게 제를 지냈다. 비가 내리도록 비는 법회(法會)도 열고, 도교의 태일(太一)에 초제(醮祭)도 올렸습니다. 그중에서도 무당을 모아 비가 내리도록 비는 취무도우(聚巫禱雨)의 기록이다. 많을 때에는 300명, 긴 날짜로는 6일씩, 흙으로 용을 만들고 비가 내리도록 빌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기우제는 잦았다.<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기우제는 음력 4월에서 7월 사이의 연중행사였습니다. 이렇게 나라에서 지내던 기우제 중에는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의 12제차가 있어서 각 명산 · 대천 · 종묘 · 사직 · 북교의 용신들에게 지내는 복잡한 절차가 있었습니다. 12제차는 가뭄의 정도에 따라서 5월에 1차, 6월에 2차를 지내기도 하고, 5월에 5차까지, 6월에 8차까지 하기도 하고, 심하면 4월에 10차까지 하고 5월에 12차까지 다 끝내는 때도 있었습니다. 조선은 무속 기우제와 승려와 어린아이도 참여하였으며 도교식 의례도 행해졌고 관원이 진행하는 유교식 의례도 정착되었습니다. 기우대상도 산천기우제의 대상이 되는 곳 외에 종묘·사직·우사단·풍운뇌우단·북교·소격전 등을 대상으로 기우제가 행해졌습니다. 국가의례에 대한 유교적 이해가 심화되면서 무속 기우제 중단에 대한 논의가 성종 때부터 시작되는데, 이어 많은 논의를 거쳐 숙종 때에 12제차의 국행 기우제의 과정이 확립됩니다. 그러면서 무속 기우제는 국행 기우제에서 배제되어 인조 25년(1647)에 종결됩니다.
안녕하세요. 노인옥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우제는 정치적, 사회적 영향을 받아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의 기우제는 국교였던 불교의 영향을 받아 스님들이 주도하고 전통 춤과 음악을 통해 하늘에 비를기원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의 기우제는 궁중에서 주로 거행되어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의 기우제는 유교적 성격 강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국교로 정착되어 기우제 또한 유교적인 색채가 진했습니다. 따라서 유교 학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궁중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많이 거행되었습니다. 지방 관아에서도 지방의 풍수를 안정시키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기도와 제사가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기우제에서는 노비들도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고려시대에 궁중에서만 거행되던 행사가 노비들과 서민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제 답변이 질문자님께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