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애의 난 당시에 이시애는 왜 항복하지않았나요?
이시애의 난 당시에 세조가 사자를 보내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되를 묻지않겠다고 했지만 사자를 참수하고 항복을 거부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시애는 "남도 군인들이 북도로 들어와 북도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움직였으며, 자기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며 진격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항복을하더라도 용서받을수없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에는 왕권에 도전하였기에 반역죄를 저질렀기에
항복을 하더라도 살지 못할 확률이 상당하였기에 그런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 불평과 백성들의 지역 감정에 편승해서 아우 시합과 매부 이명효와 반역을 음모하고 1467년(세조 13년) 5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다른 도 출신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시애는 또 중앙에서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신숙주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와 결탁하여 모반을 꾀하려 한다는 낭설을 퍼뜨려 실제 세조가 신숙주를 옥에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관군들이 이간계를 펴서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는 이주와 황생 등 이시애의 부하를 설득하여 이시애 형제를 사로잡게 됩니다. 이들 형제는 토벌군에 의해 목이 잘린 뒤 조선 8도에 효시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애초에 세조는 권력에 눈이 멀어서 자기조카를 내쫓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뒷말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래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숙청과 억압을 계속 했고
그 과정에서 이시애가 속한 북도차별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조카도 죽인 놈이 용서해 준단 말을 해도 믿을 수가 없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유교 선비로써 이미 세조가 잘못한 것이란 기치를 내서웠는데 그걸 살겠다고 버린다면
가문 전체에 똥을 칠하고서 대대손손 놀림거리가 되기 때문에 항복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조선은 건국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모든 가문이 많아봤자 할아버지 대 쯤 되면
조선사람 아닐때가 되기 때문에
이시애도 항복해서 욕먹느니 그냥 조선 버리고 할아버지 친척 여진족 한테 가는게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