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이 건설 초기 비판을 받다가 어떤 계기로 우호적인 평가를 받게 됐나요?
에펠탑이 처음 건설될 때 반응이 안좋았다고 들었는데요. 당시 시민들의 초기 비판, 그리고 후에 인정받기 시작한 이유 등을 포함하여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에펠탑이 프랑스 파리의 랜드마크가 된 이유가 궁금하군요.
현재의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착공 초기부터 도시미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흉물스럽고 추악한 철 구조물'이라는 등에 많은 비난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20년이라는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1909년에는 철거될뻔한 위기도 있었습니다.
통신 시설물을 설치하여 활용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며 해체의 위기를 간신히 넘겼습니다.
훗날 여러 영화에서 배경으로 자주 사용하면서 파리 하면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상징물이 되었으며, 현재에는 파리의 대표적인 명물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1985년 야간 조명시설이 설치된 이후 파리의 아름다운 야경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데, 밤이 되면 매 시각 정각부터 약 10분간 에펠탑이 반짝 거리는 쇼를 볼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에게 패한 치욕을 만회하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1889년 파리 엑스포에 전시할 목적으로 세웠는데, 기술을 과시하는 용도였기 때문에 20년간 설치했다가 해체예정이었으나 대중이 느끼는 시각적인 충격은 기계관 보다 에펠탑이 더 압도적이었습니다.
약 169m의 구조물인 워싱턴 기념탑, 161m의 건축물인 울름 대성당이 가장 높던 시절 등장한 300m의 타워는 큰 충격이었고 인류 역사상 이토록 인간의 구조물의 고도가 갑자기 올라간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철을 가지고 고전적 건물을 모방하기 바빴던 시대, 철골을 당당하게 드러낸 에펠탑의 위용은 새로운 신 건축의 시대를 선언하는 듯 했고 이는 에펠 같이 토목 분야에서 활동하던 구조 공학자들이 일반적인 건축가보다 산업시대의 새로운 재료들을 더 빠르게 활용했기에 가능했던 진보였습니다.
그냥 철거하기에는 아까웠던 에펠의 설득과 송신탑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어 한 프랑스 육군 고위층의 결정으로 살아남게되었고, 그렇게 쭉 있다보니 파리 시와 프랑스 전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육군의 결정대로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통신 중계탑으로 잠시 쓰이고, 1925년 첫 라디오 방송을 시작, 이후 TV방송용으로 쓰였으며 21세기에도 계속 방송 중계탑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술의 도시인 파리의 미관을 망치는 흉물, 뼈대만 앙상한 건물이 파리에 있다는 것은 참을수 없다는 예술가들의 평가와, 무너지면 사람 다 죽는다는 일반인들의 공포 등의 평을 받았는데 이는 다른 건물과 이질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변 건물은 모두 육중한 석조 건물양식인데 에펠탑은 선으로 이루어진 철탑이기때문에 더 대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에펠탑이 욕을 먹던 당시에는 파리는 석조 건물들만 즐비한 도시였으며 그 중에 홀로 이질적인 에펠 탑은 충분히 혹평 받을만 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기차역 등 많은 거대 시설들이 에펠 탑과 같은 철골 구조를 사용하여 지어지고 나서는 그럭저럭 도시 미관에 녹아 들어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또한 파리를 대표하는 핫 플레이스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 평가는 달라 졌습니다. 특히 야경은 특히 아름다운데 파이 야경은 간접 조명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아름답고 운치있게 보이게 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