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는 내성적인 작품인가요?
챗 gpt를 이용해 해당 작품에 대해 비평문을 작성해보려고 하는데, 내성적 작품이라고 서술한 것이 옳은 정보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슬픔이 사랑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관점이 독자들이 사회적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고 하는데, 그럴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 시는 ‘슬픔’과 ‘기쁨’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 통념을 뒤집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진정한 사랑에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슬픔을 어머니로 하고 눈물을 아버지로 한다. 사랑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고통 때문이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이 시는 슬픔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이기적인 삶의 자세를 반성하고, 사랑을 위해서는 슬픔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담고 있다. “기쁨”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이기적인 존재이며, 이는 “너”로 지칭되는 우리 동시대인 모두를 상징하고 있다.
반면 “슬픔”은 남의 아픔을 보듬을 줄 알고, 소외된 사람들까지 사랑하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할머니의 귤 값을 깎고, 동사자의 죽음에도 무관심한 우리들은 약자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시적 화자는 사회적 약자를 멸시의 시선이 아닌 자신과 평등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따뜻한 사랑이 절실한 존재들에게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다림의 자세를 주겠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행복에 취해서 자신만의 안일을 위해 남의 아픔에 무관심하거나 그 아픔을 돌볼 줄 모르는 이기적인 세태를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너와 함께 걷겠다”고 하며 대결의 구도가 아닌 화합과 조화의 삶을 지향한다. 이는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너”에게 알게 하면서, 슬픔이 새로운 삶의 에너지가 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는 독특한 시점을 선택하여 삶의 한 속성인 슬픔이 기쁨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참신한 표현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상식을 깨뜨리는 역설적인 발상으로 현실 비판적이고 교훈적인 시의 성격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출처 : 한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