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학문

역사

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현재 고등학교, 학원 등의 순위를 매기는 기준이 아마

서울쪽에 상위권 대학의 진학률이 어떻게 되는지에 따라

거의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국립 교육기관이 아닌,

사립 교육기관 중에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한 기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5개의 답변이 있어요!
전문가 답변 평가답변의 별점을 선택하여 평가를 해주세요. 전문가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16세기부터 발달되었으며, 선현에 대한 제사를 드리고 유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서당 또한 사립교육기관인 초등 교육 기관(오늘날의 초등학교)으로 오늘날의 학교에서는 대부분 같은 연령대의 학생들이 학년, 학급을 이루어 같은 수준의 내용을 학습하지만 조선의 서당에서는 주로 양반 자제들이 입학하였고 <천자문>, <소학」>등으로 한자를 익히고 지식을 쌓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교육기관은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구분되는데, 관학에는 서울의 성균관과 4부 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고, 사학으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습니다. 천민이 아니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양반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교육 기관으로는 한양에 국립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을 두었고,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습니다. 중등 교육기관으로 중앙에 사학과 지방에 향교가 있었으며, 사립교육기관으로 서원과 사설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을 두었습니다.

    장원급제자가 많이 나온 서당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나 구미의 선산지역은 조선시대 장원급제가 15명이나 나와 장원방이라 불릴정도로 인재가 많이 나오는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립은 대 표적으로 서원과 서당이 있습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의 제향을 위하여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으로 그 기원은

    당나라 현종 때 설립된 여정전서원과 집현전서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 고려의 유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백운동 서원이라고 한 것이 그 효시였습니다

    그 후 명종 5년 퇴계 이황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책과 노비,

    전결 등이 하사되었습니다

    그 무렵 각지의 향교는 훈도의 부족으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있었던 까닭에 조정에서는

    그 대안으로 서원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그 결과 서원은 날로 늘어나 숙종 때에는 230여개 넘게 되고

    이처럼 서원의 수가 늘어나고 조정의 지원이 끊이지 않자 서원을 중심으로 특권을 누리려는 세력이

    형성되고 부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광대한 토지를 서원이 소유하게 되고,그 토지에는 조세가 면제

    됨으로써 국가 경제에 크나큰 피해를 주고 양민이 서원의 노예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는 사례가 늘고

    유생들이 면학과 수양보다는 붕당에 휩쓸려 당론에 골몰하고 심지어는 서원을 근거로 주민들을

    토색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자 인조 22년 서원의 설립을 허가제로 하였고 효종 8년에는 서원을 누설한

    자는 처벌하다는 규정을 두기까지 했습니다

    대원군 시절 700여개소의 서원을 철폐하고 사표가 되는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폐쇄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종학당은 조선시대 230년간 73명의 급제자를 배출한 사설 교육기관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사학과 관학의 두가지 교육이 존재 했는데 관학에는 서울의 성균관과 4부 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었고, 사학으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습니다. 천민이 아니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양반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성균관과 같은 관학이 아무래도 사학 보다는 과거 급제자를 더 많이 배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