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사관들은 어떻게 권력에 독립되어서 일할수 있었나요?
현재의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하는 사관은 어떻게 그당시 왕이나 권력에서 독립되어서 기록을 객관적으로 적을수 있었나요?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보통 사관은 춘추관의 관원과 예문관 한림이 겸직하는데 실력과 가문이 두루 좋은 인재를 뽑았다고 합나다. 젊은 사관들은 자부심과 사명감이 투철해 자연히 왕과 권력자들에게는 껄끄러운 존재였으며 수난도 많이 당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후기 들어서면서부터는 사관도 당색에 물들어 사관들의 평가가 편파성을 띄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데여. 승정원일기를 작성하는 승정원의 정7품 주서(注書),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주서의 자리가 비었을 때 임명하는 임시직)도 넓은 의미에서 사관이라고 볼 수 있지요. 다만 승정원일기 특성상 '사신은 논한다'로 시작하는 사관으로서 평가는 하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관의 기록인 사초는 실록 편찬 전까지는 그 누구도 열람할 수가 없다고 하지요. 심지어 왕이라고 해도. 딱 한번, 연산군이 무오사화 때 이를 읽어보고 사관들을 대거 숙청하였던 관계로 사초를 열람하는 것은 '폭군이나 하는 행위'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때문에 연산군 이후에는 실록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연산이다. 연산이 했던 짓이다!' 라며 치를 떠니 감히 임금들이 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연산군도 사초를 자신이 직접 두눈으로 읽어본 것은 아니고 사초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확인해본게 다였다고 합나다.더불어 사관들조차도 기록을 적은 왕이 승하(昇遐)한 후에야 실록 편찬의 목적으로 열람이 가능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