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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석화구이
진지한석화구이

고려의 정중부의 난에 대하여 질문드립니다.

고려의 장군 정중부가 왕실의 잔치에 참석하였다가 수염이 불에 타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어찌하여 이런 일이 발생하였고 그로 인해 '정중부의 난'까지 벌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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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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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의 귀족정치는 숭문천무의 정책에 따라 무를 천하게 여겨 문반과 무반을 차별대우했고 문신들은 무신들을 멸시하고 무시했습니다.

    군인들은 전투와 노역에 시달리고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해 생활이 어려워 불만이 많았습니다.

    결국 1170년 의종의 보현원 놀이를 틈타 정중부, 이고 , 이의방을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횡포가 심해졌고, 그 분노를 못 참아서 무신의 난이 발생한 것입니다. 게다가 무신들이 공을 세워도 그 공을 문신들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종 때 여진의 정벌,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 등으로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하였다. 그러나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풍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은 고사하고라도 군사행동에서 문신이 지휘관이 되고 무신은 아래에서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군인들이 적과 싸워 공을 세워도 불력(佛力)에 의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부처에 돌리는 수가 많았다. 특히, 난이 일어날 무렵 문신귀족의 횡포와 수탈은 농촌경제를 크게 압박해 유민(流民)이 속출되고 농민 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동요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예종 때부터 나타나 의종 때는 자못 심각해 문신귀족정치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원인들은 마침내 난으로 폭발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