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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7

활빈당은 어떤 단체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조선역사에서 활빈당이라고 하는 단체는 어떤 단체였나요?


구성원들은 누구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활동은 어떤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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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활빈당은 13개조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자연평등’과 ‘빈부타파’ 및 ‘국가혁신’을 외쳤다. 그들은 축재한 사람들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회에 활력을 넣겠다는 소박한 공상적 사회주의사상(空想的社會主義思想)을 가지고 있었다.

    가축을 살해해 활인(活人)을 시키는 것은 어진 일이며, 비록 남의 재물을 빼앗기는 해도 활빈(活貧)을 했으니 의로운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위정자들이 규정한 표략(剽掠 : 협박하여 빼앗음)이나 노략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활빈당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의 부패한 위정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피지배층으로부터는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충청남도의 내포 지방과 충청북도의 보은 지방, 전라도의 지리산 지방 및 익산·고산·여산·장성·순창·담양·운봉·정읍·남원·함평·영광·무주·구례 등지와 경상도의 경주·하동·양산·언양·울산 등지에서의 활동은 치열하였다.

    이들의 활동 지역이 동학혁명·남학당(南學黨)·영학당(英學黨) 등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지역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활빈당은 수십 명으로부터 크게는 700∼800명으로 조직되었고, 해상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육혈포(六穴砲)로 무장한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화승총과 도창(刀槍) 및 구청제군총(舊淸製軍銃) 등을 소지하였다. 기타의 군총도 약간 소지했으나 일반적으로 원시적 무기를 사용하였다.

    활빈당에는 동학혁명군과 화적(火賊) 출신들이 많이 가담해 있었다. 출신지는 일정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모인 혼합부대였다. 또한, 활동 범위도 제한된 지역이 아니라 각지를 기동적으로 움직여 다니는 게릴라부대였다.

    이러한 점은 이전의 화적이나 민란 부대가 지방적 한계를 넘지 않았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제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관에서 식별하기 어려웠고, 그 만큼 활동이 쉬웠다.

    활빈당의 투쟁 대상은 지배층이었고, 탐관오리와 부정축재한 부호였다. 그들의 전곡(錢穀) 과 원한이 사무친 관아는 좋은 공격 목표였다. 관아나 부호를 기습하거나, 요구조건을 미리 통지하고 통고 시각에 나팔을 불고 총을 쏘면서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악질 수령과 부호들을 경우에 따라서는 처치하기도 하였다. 금품은 주로 전곡을 탈취당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예외적으로 큰 절을 습격, 비축해 놓은 곡식을 빼앗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활빈당의 목적이 부자의 재물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풂으로써 생계의 수준을 균등히 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활빈당은 위정자들에 의해 모욕적으로 낙인찍힌 일반 도둑의 무리나 폭도 혹은 비도(匪徒)가 아닌 정치적 성향을 띤 의군(義軍)이었던 것이다. 활빈당은 농민이나 행상인의 금품은 빼앗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 그 세력을 대중 속에 뿌리박을 수 있었다.

    중앙정부가 크게 놀라서 각지의 지방군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세력은 점차 확산되어갔다. 1900년에서 1904년에 걸친 5년 동안은 활빈당 활동의 최고조기였다. 당시의 모든 반봉건·반제 운동이 활빈당의 투쟁으로 결집되어 기세가 대단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활빈당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17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0년 충청남도 일대에서 시작해 남한 각지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던 무장민중집단으로 13개조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자연평등과 빈부타파 및 국가혁신을 외쳤습니다.

    활빈당의 투쟁 대상은 지배층이었고 탐관오리와 부정축재한 부호였으며 그들의 전곡과 원한이 사무친 관아는 좋은 공격 목표로 관아나 부호를 기습하거나 요구조건을 미리 통지하고 통고 시각에 나팔을 불고 총을 쏘며 들이닥치기도했으며, 악질 수령과 부호들을 경우에 따라 처치하기도 했고 금품은 주로 전곡을 탈취당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빈당의 배경 – 조선 후기 화적의 활동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민란이 각지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농민투쟁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농민투쟁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우선 17~18세기 이래 지속되어 온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이 한 요인이며, 또 하나는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봉건적 수취체제의 모순 심화와 정치 기강의 문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관료·상인·고리대금업자이 지주(地主)가 되면서 다수 농민층은 급속하고 광범하게 몰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여건은 고종 13년(1876) 개항 이후 보다 가속화되었다. 일본과의 교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된 물품은 미곡이었다. 일본자본주의는 토지로부터 축출되어 도시로 대량 방출된 노동자층과 도시빈민층을 위한 식량을 마련해야 했고, 이 도시 노동자들의 식량을 조선에서 미곡을 수집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일본에 의해 곡물시장이 확대되면서, 원래의 지주층뿐만 아니라 관료나 상인들이 토지집적 요구가 크게 자극되었고, 다수의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축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과정에서 토지에서 유리된 수많은 ‘유민(流民)’들이 발생하였으며, 이 유민들 중 일부는 무장집단화하여 부호가와 양반가를 주로 습격하는 이른바 ‘화적’이 되었다. 1900년경에 등장한 활빈당은 멀리는 조선 후기, 가까이는 19세기 후반 이래 크게 발생한 화적집단의 질적 발전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조선 후기 이래 간헐적으로 화적이 계속 발생했지만, 그것은 대개 일부 지역에 한정된 소규모의 형태였다. 그러나 고종 1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적이 더욱 현저하게 발생하기 시작한다. 특히 1876년 이후 수년간 화적이 매우 성행했는데, 이는 1876년~1877년 두 해의 한재(旱災)가 큰 원인이었다. 고종 14년(1878) 좌포청(左捕廳)에 체포된 화적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20~30명에서 60~70명 정도 무리를 지어 이동하면서 각지의 부호가와 장시를 습격·약탈하는 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고종 16년(1880) 후반에 들어서면 화적의 활동에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화적들은 부호가의 선산(先山)을 파헤쳐서 두개골을 훔쳐낸 뒤 협박문을 보내 다액의 돈과 교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무렵부터 화적들이 지방관아를 습격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되었다. 1888~1889년의 큰 가뭄은 화적의 발생을 더욱 격화시켰다. 고종 28년(1892) 경기도 고양·파주 등지에는 화적이 너무 성행하여 도로가 끊기고 장시가 공허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1870년대부터 1890년대에 이르기까지 화적의 발생 수나 그 활동 내용은 갈수록 격화되어 갔다. 특히 19세기 말경에 나타난 화적들은 전국에 걸쳐 발생했으며 장기적으로 나타났다. 광범위한 화적들의 활동 속에서, 삼남지방의 화적들은 상호 연결을 가지면서 전국적인 조직을 정비해 나갔으며, 일부는 ‘활빈당’을 통한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기도 했다.

    2 활빈당의 조직과 활동

    활빈당이 스스로를 ‘활빈당’이라고 칭하며 활동을 개시한 것은 1900년이다. 그러나 ‘활빈당’의 이름이 실제로 일부 화적들에 의해 표방되었던 것은 이미 1886년(고종 23)의 일이므로, 활빈당의 활동개시 시기도 1880년대 후반부터 살펴볼 수 있다.

    1898년에 체포된 김덕원(金德元)의 공초(供招)에 따르면, 1886년 1월 충청도 음성군 김덕원의 집에서 김몽돌(金夢乭), 박순길(朴順吉) 등 8명이 모여 박순길을 선생으로 정하고 ‘활빈당’을 결성했다고 한다. 그들은 음성·괴산 등지의 양반가에서 3차례에 걸쳐 총과 칼을 들고 재물을 탈취했고, 2월에는 김몽돌의 당류 8명이 합세하여 16명이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후 6명이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주하면서 이때의 활빈당은 해체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 김몽돌 등은 1890년대 전국적인 조직을 주도한 윤동굴(尹同屈)의 파당에 있었으며, 후일 윤동굴의 지휘 하에 있던 화적들이 1900년 활빈당을 다시 결성하였으므로 1886년(고종 23)의 활빈당은 1900년 활빈당의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90년대 남한지역의 명화적(明火賊) 조직을 통일한 인물은 윤동굴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파당의 근거지를 경상도 서북지방에 두면서 남한지방의 명화적을 통솔했다. 그는 개별적으로는 김몽돌과 같은 당을 이루어 활동했기 때문에, 1886년의 활빈당은 김몽돌과 윤동굴의 인맥 속에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마련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1897년 윤동굴과 그의 동료들은 전북 금산 부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한편 1890년대 경기·충청 일대에서는 마중군(馬中軍)의 세력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1897년에는 전라·경상도 지역을 순회하다가 1898년에는 강원도 지역에도 나타났다. 1890년대 후반 마중군은 이처럼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각지의 화적들을 모아 밀접한 유대관계를 확보해갔다. 이를 토대로 마중군은 1900년 3월 경기·충청지역의 활빈당 결성을 주도할 수 있었다.

    또한 1890년대 충청도 일대에서 주로 활약한 또 하나의 인물은 맹사진(孟士辰)이다. 맹사진은 1896년 경부터 일명 맹감역(孟監役)이라고 자칭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는 1896~1897년경 공주와 충주 부근에서 활동하다가 1898년부터는 금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이 지역을 근거로 활동을 전개했다. 1900년에 들어서 맹사진의 적당들은 마중군 세력과 연합하여 활빈당을 결성하게 된다.

    1900년 3월 들어 충청도 금강유역에서 활빈당을 주창하는 조직의 활동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후 보도에 따르면 활빈당은 금강유역에서 시작되어 3월 말에는 충청북도 지방까지 파급되고 있었으며, 주로 4~50명씩 무리를 지어 총검을 들거나 말을 타고 다니면서 부민의 재산을 약탈했다고 한다. 그들 중 일부는 4월에 경상북도 상주(尙州) 지역까지 옮겨가 ‘활빈당대장의기(活貧黨大將義旗)’라고 쓴 깃발을 들고 활동하는 등, 충청북도과 경상북도 접경지역에서도 출몰하기 시작했다. 충청도지역의 활빈당은 1900년 겨울부터는 바다로까지 진출, 충청·경기 연안에서 수적(水賊)으로 활동하면서, 부근 촌락의 부민가를 약탈했다. 충청도 활빈당의 일부가 수적으로 활동하는 동안, 또 다른 일파는 경기도 지역으로 그 세력범위를 넓혀나갔다.

    활빈당은 충청도뿐만 아니라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즉 경상좌도에서 활동하던 파당도 있었다. 이 지역에서 활빈당의 결성 시기는 경기·충청지역 활빈당이 결성된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지역 활빈당의 본격적인 활동이 보도된 것은 8·9월경이었다.

    또 하나의 활빈당 조직은 주로 소백산맥 줄기를 타고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역과 전라도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던 파당이었다. 1900년 봄 전라북도 고산(高山) 지역에서 출몰하여, 1905년 무렵까지 활동했다. 다만 이 파당의 움직임에 대한 기록이 가장 적어 자세한 활동은 파악할 수 없다.

    위와 같이 활빈당의 전국적인 조직은 크게 위와 같이 경기·충청 지역, 경상좌도 지역, 경상도 서부·전라도 동부 지역의 3파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3파 간에는 어떤 종적인 지휘체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상호 횡적인 연대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각 파는 약 50~100명의 구성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80년대 후반 이후 활빈당 조직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체포된 숫자만 200명 정도이니, 체포되지 않은 수를 감한다면 규모는 상당했을 것이다. 1902년 그들은 「활빈당발영」을 통해 그들 조직구성원이 5,772명이라고 밝힌 바가 있는데, 물론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숫자이나 그들의 숫자가 상당했음은 틀림없다.

    활빈당의 전체적인 조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활빈당 조직의 전체적인 내용은 상층 지도부 중 극소수만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적이나 활빈당을 막론하고, 입당 절차는 전통적으로 같은 당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박한 뒤 칼을 입에 물고 땅에 엎드려서, 혹은 몽둥이로 몇 대를 맞으면서 잡혔을 때에도 당의 동료들을 팔지 않는다는 맹세를 해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0년충청남도 일대에서 시작하여 남한 각지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던 무장민중집단.입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활빈당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의적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활빈당의 의미를 알려드리면

    활빈당 정의> 1900년 충청남도 일대에서 시작하여 남산 각지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가치를 들고 봉기했던 무장만 중집단 입니다.

    활빈당은 1900년 2월 충청남도 내포 지방의 산청.예산.대흥.청양.홍주.덕산.해미.법성.보령.남포 등지에서 봉기한 뒤 충청북도.경기도.강원도.영남.호남, 등 남한 각지로 그 세력이 파급되어 1904년 까지 치열한 투쟁을 전개 하였습니다.

    활빈당 이라는 당호를 확실하게 고증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1886년 (고종 23)에 충청북도 음성에서 활빈당 강호로 소집단의 당적이 일시 활동한 바 있고, 17세기 초반에서 시작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위에서 언급했듯 허균의 홍길동전 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활빈당은 13개조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자연평등과 빈부타파 및 국가 혁신을 외쳤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0년 2월경 충청남도 내포(內浦) 지방의 신창·예산·대흥·청양·정산·홍주·덕산·해미·법성·보령·남포 등지에서 봉기한 뒤, 충청북도·경기도·강원도·영남·호남 등 남한 각지로 그 세력이 파급되어 1904년까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활빈당이라는 당호(黨號)를 확실하게 고증하기는 어렵다. 다만 1886년(고종 23)에 충청북도 음성에서 활빈당 당호로 소집단의 당적(黨賊)이 일시 활동한 바 있고, 17세기 초반에 저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허균(許筠)의 「홍길동전」에도 나온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활빈당이 스스로를 ‘활빈당’이라고 칭하며 활동을 개시한 것은 1900년입니다. 그러나 ‘활빈당’의 이름이 실제로 일부 화적들에 의해 표방되었던 것은 이미 1886년(고종 23)의 일이므로, 활빈당의 활동개시 시기도 1880년대 후반부터 살펴볼 수 있습니다.


    1898년에 체포된 김덕원의 공초에 따르면, 1886년 1월 충청도 음성군 김덕원의 집에서 김몽돌, 박순길 등 8명이 모여 박순길을 선생으로 정하고 ‘활빈당’을 결성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음성·괴산 등지의 양반가에서 3차례에 걸쳐 총과 칼을 들고 재물을 탈취했고, 2월에는 김몽돌의 당류 8명이 합세하여 16명이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6명이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주하면서 이때의 활빈당은 해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김몽돌 등은 1890년대 전국적인 조직을 주도한 윤동굴의 파당에 있었으며, 후일 윤동굴의 지휘 하에 있던 화적들이 1900년 활빈당을 다시 결성하였으므로 1886년(고종 23)의 활빈당은 1900년 활빈당의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90년대 남한지역의 명화적(明火賊) 조직을 통일한 인물은 윤동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파당의 근거지를 경상도 서북지방에 두면서 남한지방의 명화적을 통솔했습니다. 그는 개별적으로는 김몽돌과 같은 당을 이루어 활동했기 때문에, 1886년의 활빈당은 김몽돌과 윤동굴의 인맥 속에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마련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97년 윤동굴과 그의 동료들은 전북 금산 부근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1890년대 경기·충청 일대에서는 마중군의 세력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1897년에는 전라·경상도 지역을 순회하다가 1898년에는 강원도 지역에도 나타났습니다. 1890년대 후반 마중군은 이처럼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각지의 화적들을 모아 밀접한 유대관계를 확보해갔습니다. 이를 토대로 마중군은 1900년 3월 경기·충청지역의 활빈당 결성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1890년대 충청도 일대에서 주로 활약한 또 하나의 인물은 맹사진입니다. 맹사진은 1896년 경부터 일명 맹감역이라고 자칭하면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1896~1897년경 공주와 충주 부근에서 활동하다가 1898년부터는 금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이 지역을 근거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00년에 들어서 맹사진의 적당들은 마중군 세력과 연합하여 활빈당을 결성하게 됩니다.


    1900년 3월 들어 충청도 금강유역에서 활빈당을 주창하는 조직의 활동이 황성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보도에 따르면 활빈당은 금강유역에서 시작되어 3월 말에는 충청북도 지방까지 파급되고 있었으며, 주로 4~50명씩 무리를 지어 총검을 들거나 말을 타고 다니면서 부민의 재산을 약탈했다고 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4월에 경상북도 상주 지역까지 옮겨가 ‘활빈당대장의기’라고 쓴 깃발을 들고 활동하는 등, 충청북도과 경상북도 접경지역에서도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충청도지역의 활빈당은 1900년 겨울부터는 바다로까지 진출, 충청·경기 연안에서 수적(水賊)으로 활동하면서, 부근 촌락의 부민가를 약탈했습니다. 충청도 활빈당의 일부가 수적으로 활동하는 동안, 또 다른 일파는 경기도 지역으로 그 세력범위를 넓혀나갔습니다.


    활빈당은 충청도뿐만 아니라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즉 경상좌도에서 활동하던 파당도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활빈당의 결성 시기는 경기·충청지역 활빈당이 결성된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 활빈당의 본격적인 활동이 보도된 것은 8·9월경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활빈당 조직은 주로 소백산맥 줄기를 타고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역과 전라도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던 파당이었습니다. 1900년 봄 전라북도 고산 지역에서 출몰하여, 1905년 무렵까지 활동했습니다. 다만 이 파당의 움직임에 대한 기록이 가장 적어 자세한 활동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위와 같이 활빈당의 전국적인 조직은 크게 위와 같이 경기·충청 지역, 경상좌도 지역, 경상도 서부·전라도 동부 지역의 3파로 나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3파 간에는 어떤 종적인 지휘체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상호 횡적인 연대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각 파는 약 50~100명의 구성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880년대 후반 이후 활빈당 조직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체포된 숫자만 200명 정도이니, 체포되지 않은 수를 감한다면 규모는 상당했을 것이다. 1902년 그들은 「활빈당발영」을 통해 그들 조직구성원이 5,772명이라고 밝힌 바가 있는데, 물론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숫자이나 그들의 숫자가 상당했음은 틀림없습니다.


    활빈당의 전체적인 조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활빈당 조직의 전체적인 내용은 상층 지도부 중 극소수만이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적이나 활빈당을 막론하고, 입당 절차는 전통적으로 같은 당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박한 뒤 칼을 입에 물고 땅에 엎드려서, 혹은 몽둥이로 몇 대를 맞으면서 잡혔을 때에도 당의 동료들을 팔지 않는다는 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명으로 적호(賊號)를 따로 부여받기도 했습니다. 조직체계에 대해 철저한 보안, 입당시의 맹세, 가명 사용, 조직에 대해 발설할 시 보복 조치 등을 통해 활빈당은 철저히 베일 속에 싸인 채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