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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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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은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떤 업적을 달성했나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해외 선진기술을 공부하고 습득하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요. 실제 그들은 어디나라에 가서 어떤 문물을 가지고 일본에 전달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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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이보다 10년 전인 1871년 11월부터 1873년 9월까지 1년 10개월에 걸쳐 구미 12개국을 순방하였습니다. 이 사절단은 특명 전권 대사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를 비롯해 참의(參議)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대장경(大藏卿) 오쿠보 도시미치, 공부대보(工部大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외무소보(外務少輔) 야마구치 나오요시(山口尙芳) 등 정권의 실세들과 정부 각 부서의 중견 실무 관리 41명 등 공식 사절 46명을 비롯하여 18명의 수행원과 43명의 유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미국·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독일·러시아·덴마크·스웨덴·이탈리아·오스트리아·스위스 등 구미 선진 국가를 공식적으로 방문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중동과 아시아의 낙후된 상황도 관찰하였습니다.

    산조 사네토미의 송별사에도 나오듯이 전권 대사 이와쿠라 도모미와 부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자 귀국 후 헤게모니를 장악한 실세였습니다. 시찰을 통해 얻은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오쿠보 도시미치는 ‘입헌 정체에 관한 의견서’, 기도 다카요시는 ‘헌법 제정의 건언서(建言書)’를 제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국가 구상, 다시 말해 일본형 국민 국가의 창출을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구 근대의 성과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이 후진성을 극복하고 근대 국가로 순조롭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제, 산업, 군사, 교육 모든 부문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고 인식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은 시찰에서 돌아와 내정 개혁을 외치며 정한론에 반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정한론을 반박하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작금(昨今) 정부는 여러 산업을 일으켜 부강의 길을 꾀하고 있다. 대부분은 수년 뒤를 기다려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육해, 문부, 사법, 공학, 개척 사업 등과 같이 모두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그 효과를 기대할 것이 못 된다.” 그리고 사절단의 중견 관리나 유학생들도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하여 일본형 국민 국가의 형성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71년 ~ 1873년경에 메이지 4년부터 메이지 6년까지 12개국 구미 시찰단은 일본 과도정부에서 유럽과 미국에 파견한 사절단의 이름 입니다. 특명전권대사인 이와쿠라 도모미의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사절단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목적은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 및 개정과 정부 고위 관료들의 일본 근대화를 위한 견문이였습니다. 그 중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 개정은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사절단 파견 이후에 이루어지게 되지만 일본 고위 관료들의 근대화에 대해서는 충분히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받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