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정몽주를 암살하고 나서 이후 어떤형태로 정몽주를 평가하여 당위성을 펼치나요
정몽주를 암살하고 나서 이성계가 사후 처리를 했을텐데요
이후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정몽주의 시신을 어떤 형태로 처리하고 백성들에게 보여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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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상훈 전문가입니다.
정몽주는 고려 왕조의 충신이자 역성혁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충성심은 유교사회에서는 무엇보다 높은 가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가 펴낸 고려사에서는 정몽주를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조선왕조의 창건에 대한 일명의 정치선전인 신용비어천가에서는 정몽주를 천명을 거스르며 시의를 제대로 모르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정몽주를 살해한 것에 대해서 조선 왕조가 백성들에게 이를 납득시키거나 그의 시신을 보여줄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1392년 4월 이방원 일파에게 개경의 선죽교에서 암살된 정몽주는 그의 시신은 베어져 개경의 저잣거리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우현보와 송악산의 승려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염습한 뒤 개경 풍덕으로 옮겨져 가매장되었다가 후일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정몽주가 살해되고 나서 이성계는 격노했다고 합니다. 이에 이방원은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 것이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즉, 이방원 등 조선 건국 세력은 정몽주를 역적으로 몰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