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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4.03.14

조선시대 신문고는 실제로 효과가 있었나요?

현재 한국의 민원 신청 플랫폼인 신문고는 조선시대 신문고에서 따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 유래였던 조선시대 신문고도 그만큼 효과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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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신문고 제도느 ㄴ백성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태종 1년(1401)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문고를 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고 합니다.

    <경국대전>과 <태종실록> 등에 의하면, 서울 거주자는 담당 공무원에게 지방 거주자는 그 지역의 도지사·군수 등에게 민원을 제기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검찰·감사원에 호소하고, 그럼에도 해결이 안 되면 서울의 의금부(현 공수처)에서 신문고를 지키는 담당자에게 신원조회를 받고 진술서·고소장을 제출한 후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신문고를 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글을 모르는 대부분의 백성들보다는 엘리트층에게 이용 기회가 치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서울까지 올라와야 하는 물리적 제약도 컸습니다. 신문고는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가 영조 때 부활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문고는 조선의 통치자인 국왕·관인이 그들을 중심으로 한 통치체제를 유지하고, 동시에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하정을 상달하고 원억을 펴게 함으로써 선정을 도모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청원·상소·고발 시설로서 제도화되었으나, 실제로는 엄격한 신문고 운영 규정 및 국가의 통치력과 관련되어 소수 지배층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데 쓰여졌습니다.

    이 제도가 활발히 운영된 것은 태종∼문종대였으며, 그 이후는 격쟁의 이용과 함께 유명무실해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셋째 임금이 된 태종은 대궐 밖에 신문고를 두도록 했는데 신문고는 백성이 분하고 답답한 일을 임금에게 하소연할 때마다 치게 한 북이었지만 실제로는 신문고의 이용은 주로 서울의 관리들에게만 한정되었으며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일반 상인(常人)이나 노비 또는 지방 관민에게는 효용이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민이 행정기관애 어떤 행위나 답변을 요청하는 행정의 민주화와 신뢰성을 향상시키고 국민들이 가장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행정규제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태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신문고는 백성이 직접 왕에게 호소할 수 있도록 설치되었지만, 실제 효과는 제한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악용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권력욕에 눈이 먼 사람들이 신문고를 남용하여 정적을 모함하거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분 제도의 벽이 존재했습니다.신분이 낮은 백성은 신문고를 치는 것만으로도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왕의 능동적인 참여가 필요했습니다.신문고를 통한 민원 처리가 왕의 판단에 달려 있었기에, 왕의 관심과 의지가 부족하면 제도 자체가 무력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신문고는 현대 민원 신청 플랫폼과 비교했을 때, 백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